▲<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며 산다> 표지
시와사회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며 산다>
그 책이 나온 뒤 출판사 정 대표는 시장 반응이 시큰둥하다고 책 제목을 크게 탓했다. 나는 '그대의 초상(肖像)'이란 제목은 아름다운 한 여인의 모습을 형상화하여 붙였다. 그런데 정 대표는 그 초상을 '초상(初喪)'으로 해석하면서 제목을 바꾸라고 권유했다.
그리하여 제2부 '빛과 그림자' 편을 낼 때는 책 제목을 <그리움의 향기>로 바꿨다. 그래도 시장 반향이 시원치 않았다. 그러자 출판사에서는 더 이상 광고도 하지 않고 내 책 판매를 포기하는 듯했다.
나는 그제까지 고집했던 분단문제, 이념문제는 다루지 않는다고 작심하고 집필했다. 그런데 출판된 작품을 보니까 해직 기자와 비전향 장기수 딸의 순애보로 이념문제가 작품 속에 농익어 있었다. 영업사원 출신인 정 대표는 작품성보다 시장 반향을 제일 우선시했다. 그게 출판사가 살아남는 길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었다.
1993년 추석 때 마침 고종아우인 김윤태 문학평론가가 내 집에 왔다. 이런저런 얘기를 끝에 나의 첫 장편소설 얘기를 했다. 그러자 그는 자기가 편집위원으로 있는 한 출판사에 주선해보겠다고 말했다.
나는 원작을 다시 가다듬어 곧장 그가 추천한 시와사회 출판사로 보냈다. 원고를 넘긴 지 사흘 만에 연락이 왔다. 그 출판사 대표 이소리 시인은 만나자마자 선뜻 자기 출판사에서 내겠다고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썼다.
곧 초교 교정지와 함께 머리말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다음과 같이 썼다.
"매미란 놈은 여름 한철 동안 울기 위해 땅속에서 10여 년간 유충 시기를 보낸다고 한다. 나는 이 한 편의 소설을 쓰기 위해 무려 오십 년간의 세월이 걸렸다. "
새로운 제목을 고심하던 가운데 그 무렵 출근길 시내버스가 독립문고가도로 위를 지나는데 문득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며 산다'는 말이 불쑥 떠올랐다. 사실 나는 늘 누군가(어머니)를 그리며 살고 있었다.
이 책이 발간되자 몇 신문에 서평이 나갔다. 그러자 여러 방송국에서 출연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그때마다 책 판매를 위해 빠지지 않고 출연했다. 그런 탓인지 초판 3000부가 한 달여 만에 나갔고, 곧 재판이 나왔다.
지난날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 간사였던 이소리 대표는 나를 신입회원으로 추천한 바, 1994년 6월에 정식으로 민족문학작가회의에 입회했다. 당시 이사장은 백낙청 선생, 상임이사는 정희성 시인, 총무간사는 이승철 시인이었다.
그때 민족작가회의에서는 매달 마지막 토요일을 만남의 날로 정해놓아 그 자리에서 여러 문인과 친교를 나눴다. 그때 알게 된 분으로 이기형, 이경자, 현기영, 김영현, 이오덕, 유시춘 선생 등이었다.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1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공유하기
"소설 한 편을 쓰기 위해 50년이 걸렸습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