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여수의 은사 댁으로 찾아가 인사드리다.
권태균 사진작가
고교 은사 박철규 선생님
그 무렵 어느 일요일 동네(서울 종로 구기동) 한 목욕탕에 갔다가 한 친구를 만나 가까운 커피집에서 차담을 나누었다. 그는 원래 고3 때 짝이었던 염동연(전 국회의원)의 외대 독문과 친구인 바, 대학 1학년 때 전남 보성 친구집에 갔다가 어울려 알게 됐다. 그 이후 대학 2학년 때 그가 내가 재학 중이던 대학 경제과로 편입해 와서 더욱 친밀하게 지낸, 부산의 한 고교 출신이었다.
"박형, 그새 작품집 낸 것 있습니까?"
"웬걸요, 아직 등단도 못 했습니다."
낙담하는 나를 보고 그는 자신의 얘기를 조심스럽게 들려주었다. 그 몇 해 전에 최고령으로 외무고시에 합격한 얘기를.
"청춘을 담보삼아 여섯 해나 떨어지고 나니까 아찔하대요. 그런 뒤 냉철히 반성해 보니까 나 자신이 공부에 대해 오만했어요. 예를 들면 5천년 한국사를 공부하면서 2개월 작전을 세웠거든요. 그게 말이 됩니까? 게다가 떨어진 그 이듬해에는 지난해 부족한 교과 중심으로 대충 공부하고 다시 시험에 임했었지요. 그렇게 여섯 차례나 낙방한 그다음 해는 각오를 다졌습니다. 새 출발에 앞서 나 자신의 오만함을 깊이 반성하고 백지상태로 초등학생의 처지로 공부했습니다. 그랬더니 운명의 신은 그해 최고령으로 합격 시켜 주더군요."
그 친구의 얘기를 듣는 순간, 바로 내가 20년 가까이 신춘문예에 낙방한 원인의 답을 얻었다. 그동안 나는 문학 공부를 열정적으로 하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고교시절에 얻은 문명이 큰 독이었다. 나는 얄팍한 내 재주에 취해 감나무 밑에서 홍시가 입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요행꾼이나 다름이 없었다.
한 실례로 대학 재학 당시, 영문과 노희엽 교수로부터 '세계문학' 강의를 들었을 때다. 매주 노 교수의 '세계문학 리스트' 작품을 한 권씩 읽고, 리포트를 제출케 했다. 그런데 나는 그 작품을 정독, 통독하지 않고, 해설집이나 축소판만 보고 리포트를 써서 제출했다. 그리고는 그 줄거리나 주인공만 달달 외워 시험에 치른, 학점만 용케 따는 요령꾼으로 얕게 문학공부를 했다.
문학이란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인데, 그게 그리 쉬운 공부인가? 설사 그런 요행으로 등단했다면 작가로서 그의 생명이 얼마나 가겠는가? 그 친구와 헤어진 후 귀가하면서 나는 참으로 많은 자성을 했다. 내 인생에 귀한 만남이었다.
그날 이후 나도 마음속 자만심을 버렸다. 세상사를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 무명하다는 초등학생의 처지가 됐다. 그때부터는 글을 쓸 때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에도 프로야구 마무리투수처럼 최선을 다하는 습관을 길렀다.
하지만 이미 마흔(황금기)을 넘긴, 정시 기차를 놓친 듯한 패배감에서 오는 우울증으로 지냈다. 그 시절 어느 날 교사로서 판서를 많이 쓴 데서 오는 어깨통증으로 한방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고 있을 때였다. 퇴직 후 고향 여수에서 지내시던 박철규 선생님이 안부 전화를 했다.
인사말이 오간 끝에 내가 아직 소설로 등단치 못했다고 하니까 박 선생님은 조심스럽게 말씀했다.
"박군, 내가 보기에 자네는 수필이 더 좋아. 이참에 수필가로 진출해보시게."
통화를 마친 뒤 선생님의 말씀을 새겼다. 어쩌면 선생님은 제자를 적확히 보신 다음의 충고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