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인마을이 곳은 예전에 한센인들의 정착촌인 '에틴저 마을'이 있었다.
강대호
혹시 '미감아(未感兒)'라는 단어를 들어 보았는가? 사전적 의미로는 "병따위에 아직 감염되지 아니한 아이"를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한센병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한센병에 걸리지 않은 아이를 한때 미감아라고 불렀다.
우리나라에는 예전에 한센병을 치유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 전국에 있었다. '음성 나환자촌'이라고도 불렀는데, 서울 서초구 내곡동의 헌인마을도 그중 한 곳이었다. 한 마을에서 가족을 이루고 살았으니 아이들은 계속 태어나고, 그 아이들이 학령기가 되면 학교에 가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지역사회는 한센인과 그 가족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1969년 서울 성동구 내곡동(당시엔 지금의 강남 3구가 성동구였다)에 있던 음성 나환자 정착촌 '에틴저 마을'의 학령기 아동 5명이 인근 '대왕국민학교'에 입학하려 했으나 문제가 생겼다. 에틴저는 그 마을에 도움을 준 외국인 선교사의 이름이다.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이 발행한 '미감아증명서', 즉 '이 아동은 한센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다는 증명서'를 첨부해 입학을 허가한다고 했으나 학부모들이 들고 일어났다. <조선일보> 1969년 4월 26일자에 실린 '또 미감아(未感児) 울리는 분별없는 등교 거부' 기사는 대왕국민학교 전교생이 등교 거부하고 있다고 전한다.
기사 제목의 '또'라는 단어에서 보듯이 한센병 자녀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움직임은 그 이전부터 계속 있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한센인 자녀 중 감염되지 않은 아이들을 '미감아 보육원'에 수용하기도 했다.
한센인 시인 '한하운'은 <경향신문> 1962년 3월 17일자에 기고한 '나병은 상품이 아니다' 칼럼에서 한센인 차별 정책을 비판하며, 특히 한센인 자녀 교육 문제 해결을 촉구한다.
특히 등교 문제에 있어서 아직도 반대를 받고 있는데 시급히 등교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거절된 교육에서 군에 입대한 모순을 시정 하여야 한다.
한하운은 한센인 자녀들에게 학교는 가지 못하게 하면서 군대는 가라고 하는 모순을 지적한 것이다. 이렇듯 한센인 자녀들이 학령기가 되어 인근 학교에 입학하려고 하면 항상 지역사회의 극렬한 반대가 있었다.
1969년에도 서울의 대왕국민학교뿐 아니라 경기도 용인에서도 등교 거부하는 학교가 있었다. 문제가 점점 커지자 당시 문교부 장관이 자기 딸을 대왕국민학교로 전학 보내고 각계각층이 나서 계몽 활동을 벌여도 학부모들을 설득하기는 힘들었다. 대신 새로운 학교의 설립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마침 미감아와 일반 아동을 통합 교육하겠다고 나서는 데가 있었다. 바로 한국신학대학교였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돼 1969년 6월 22일 한국신학대학 병설 한신국민학교가 개교했다. 1969년에는 미감아 아동들만 교육했으나 1970년부터는 일반 아동들도 모집했다. 1973년에 나와 함께 입학한 내 짝도 한강 건너 멀리에 있던 내곡동 에틴저마을에서 온 미감아였다.
여전히 '관리' 당하는 한센인
당시 일들을 좀더 알아보기 위해 한신초등학교를 방문했다. 강북구 수유동에 있던 학교는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긴 지 오래였다. 40년 가까이 근무한 강종국 교장은 그 아이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1991년 마지막 한 아이가 졸업한 뒤로 미감아 합동 교육은 종료됐습니다. 비록 한 명이었지만 학교에서 큰 관심을 보였던 기억이 납니다."
강 교장은 학교 자료를 여럿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초창기 학교 설립에 관한 내용과 미감아 교육에 대한 자료도 있었다. 그 중 20년 넘게 내곡동 '에틴저 마을'의 아이들을 통학시킨 스쿨버스 기사가 마지막 한 명 남은 아이를 자신의 승용차로 통학시켰다는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