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항쟁의 지도자, 선산군 민전 사무국장 겸 선산인민위원회 내정부장 박상희 선생.
박준홍
10․1 항쟁과 박상희
내가 첫돌도 되기도 전인 1946년 10월 1일에 대구 경북 일대에 미군정의 실정에 민중들이 항거하는 '10.1 항쟁'이 소용돌이쳤다. 아버지는 그 항쟁에 청년 행동대원으로 앞장서서 가담했다. 하지만 진압과정에서 체포돼 선산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
당시 선산경찰서는 구미면 원평동에 있었는데 우리 집과는 200m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그때 함께 경찰서에 유치됐던 항쟁지도자 박상희 선생(박정희 대통령의 셋째형)은 일제강점기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선산지국장을 지낸 언론인으로 신간회에도 관여한 대단한 민족주의자였다.
그분은 해방 직후 선산군 민전(民戰,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준말로 좌파계열의 연합단체) 사무국장 겸 선산군 인민위원회 내정부장이었다. 10월 1일 대구에서 일어난 10월 항쟁의 불길은 경북 전 지역으로 확산됐다. 그러자 박상희 선생은 구미지역 항쟁지도자로 10월 3일 오전 9시 무렵 2000여 군중을 이끌고 선산경찰서를 공격했다. 구미에서도 항쟁의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그때 군중들이 경찰서장과 경찰관을 공격하려 하자 박상희 선생은 이를 제지해 경북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동족 간 유혈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박상희 선생은 10월 6일 새벽 충청도에서 지원 온 진압경찰이 쏜 총을 맞고 경찰서 아래 누렇게 익은 벼논에 쓰러진 후 곧 절명해 가마니에 싸여 형곡동 어귀 공동묘지로 갔다고 전해진다.
박상희 선생을 잘 아는 이는 그분이 나라를 이끌 훌륭한 인재였다면서 해방 공간에서 비명에 가신 게 매우 안타깝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하지만 역사에 빛을 보는 사람은 엉뚱한 경우가 많았다. 동생 박정희 대통령의 그림자에 가려진 형 박상희 선생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질 날이 오리라.
나의 아버지는 10.1 항쟁 진압 후에도 계속 유치장에서 갇혀 지냈다. 그러다 항쟁 진압 3주가 지난 뒤 구미초등학교 교사직 사표를 내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이후 아버지는 실직 중 초등학교 동창인 김교식 해군 장교의 주선으로 해운공사에 사무장으로 입사했다. 그리하여 어머니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어린 손자인 나를 당신들이 맡는 조건으로 아들 내외의 신접살림을 나게 했다. 그래서 나는 유소년 시절을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서 자랐다.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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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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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셋째형 박상희 선생은 어떻게 돌아가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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