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구글 지도
베를린장벽 붕괴는 1989년 11월 9일 있었다. 헝가리 정세는 이 사건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동독보다도 먼저 공산당이 약해진 헝가리에서, 김종인과 국민의힘처럼 당의 쇄신을 도모하는 그룹이 있었다. 헝가리 공산당인 헝가리사회주의노동자당 내부의 개혁파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1989년 10월 헝가리사회당을 창당했다. 이 당은 자본주의 당이 아니라 여전히 공산주의 색채를 띤 정당이었다. 당명도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산당 경력이 마이너스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전 이름과 비슷한 당명을 갖고 활로를 모색했으므로, 이들이 처한 난관은 국민의힘이 처한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고 볼 수 있다.
자산 90% 사회 환원... 처절한 생존전략
하지만 헝가리사회당의 도전은 결국 성공했다. 그동안 부침이 있긴 했지만, 이들은 소련도 몰락하고 동구 공산권도 몰락한 세상에서 지난 30년간 유력 정당 지위를 유지해왔다. 이들의 쇄신 작업이 성공한 비결과 관련해, 2013년에 명지대 미래정치연구소가 발행한 <미래정치연구> 제3권 제1호에 실린 정치학자 박경미의 '탈공산화 이후 공산당 계승정당의 생존전략'은 이들의 전략을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 번째 전략은 공산당의 법적 정통성을 계승하되 차별화를 내세우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나왔지만 그곳과는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이들은 정강정책을 사회주의에서 사회민주주의로 수정하고 좌파가 아닌 중도좌파의 노선을 표방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중은 정치인들을 대체로 불신한다. 과거와의 차별을 선언하고 이념을 수정하면 당이 어느 정도는 바뀌겠지만 그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문서나 말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체적 실천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대중은 신뢰를 보내지 않는다. 헝가리사회당도 이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이 어떻게 했는지, 위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공산당이 보유하였던 자산을 버림으로써 공산당과 실질적인 거리두기를 실현하는 방식을 꼽을 수 있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위한다는 명분에서 공산당을 잇는다는 법적 연속성은 유지한다고 하였지만, 1990년 초까지 공산당 자산의 90% 이상을 사회에 환원하여 실질적인 단절을 추진하였다."
물질에 최고의 가치를 둘 수는 없지만, 자기 재산을 무언가에 사용하는 것은 진심을 명확히 보여주는 방법 중 하나다. 공산당 때 확보한 재산의 90% 이상을 환원하는 조치는 헝가리사회당의 진심을 보여주는 첩경이 됐다. "이는 MSZP가 초기에 대중적 인기를 얻게 한 중요한 요인"이라고 위 논문은 평가한다.
2004년 3월 24일 한나라당과 박근혜는 10층짜리 당사를 나와 천막당사로 들어갔다. 헝가리사회당은 이 정도에 그치지 않고 재산을 거의 다 버리고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 당 쇄신의 격이 달랐던 것이다.
헝가리사회당의 두 번째 전략은 체질을 바꾸는 것이었다. 이들은 공산당의 조직 원리인 민주집중제에 연연하지 않았다. 당 간부나 기관들을 상향식으로 선거하되 하부가 상부에 복종하는 민주집중제에 집착하지 않고, 지방 지부에 정책결정권과 공직선거 후보자 선출권 등을 나눠줬다. 당비 액수도 지방 지부가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했다. 이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당에 애착을 갖도록 하고 그들에 의해 당이 살아나도록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세 번째 전략은 특정 그룹의 유권자들에게 집중적으로 '러브콜'을 보내는 것이었다. 공산당 몰락이라는 위기 상황 앞에서 여러 그룹을 죄다 끌어들이려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노동조합 쪽으로 집중적인 구애 작전을 벌였다. 과거 공산당의 지지 기반과 겹치는 노동조합 쪽에서 지지 기반을 확보하고자 했던 것이다. 조직을 확충하는 확실한 방안을 선택했던 것이다.
헝가리사회당은 재산을 내놓고 권한을 이양하는 과감한 전략을 구사하면서도 지지 계층을 고를 때만큼은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 이전에 거리를 뒀던 그룹을 상대로 '앞으로는 우리가 책임질 테니 지지해달라'며 접근하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이다.
핵심은 외형 아닌 '내면 혁신'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