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문학동네
이길보라 감독이 스스로 서문에서 밝혔듯,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는 단순히 유럽의 교육과 문화에 대한 예찬을 늘어놓는 책이 아니다. 그보다는 코다(CODA, Child of deaf adult, 청각 장애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비장애인 자녀)로 아주 어릴 적부터 농인과 청인의 세상을 연결했던 그가 암스테르담과 한국을 오가며 느낀 '경계인'의 시선을 담은 기록에 가깝다.
이길보라 감독은 말한다. 세상에 유토피아는 없고, 네덜란드에도 인종차별을 비롯한 무수한 '구별짓기'가 존재하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는 다양한 '시도'들을 목격했다고. 실제 그가 경험한 네덜란드는 총리든 학장이든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며, 성소수자들의 축제인 프라이드 페스티벌에 암스테르담 인구의 절반에 육박하는 인파가 몰려드는 나라였다.
물론 한국과 네덜란드, 너무 다른 두 세계를 오가는 과정에서 해프닝이 없었던 건 아니다. 가령, 그는 필름 아카데미에서 진행한 첫 프레젠테이션에서 당황스러움을 느낀다. 그간 만들어온 작품을 소개하며 자신이 농인의 자녀이자, 탈학교 청소년이었다고 설명했을 때 강의실에 있던 동기나 교수, 그 누구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한국에선 보통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청중들이 놀라거나 감동 받아 발표의 분위기가 고조됐는데, 아무런 감정적 동요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강의실에 앉아 있는 이들의 나이와 출신, 가족 구성만 해도 몇 마디로 정리할 수 없을 만큼 복잡했다. 학교를 중퇴한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니까, 그곳에서 이길보라 감독이 걸어온 삶은 놀랍거나 특이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이길보라 감독은 "나를 둘러싼 환경과 맥락이 달라졌고 그에 따라 나의 작업 역시 달라져야만 했"음을 깨닫는다.
경계를 없애는 시도와 모험들
'다름'이 이상하지 않은 나라에서, 이길보라 감독은 작품뿐만 아니라 삶의 방식에 대해서도 변화를 꾀한다. 식비를 아끼기 위해 슈퍼마켓 음식이나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화장이나 옷차림에 들이는 시간을 줄인 것. 사소하지만,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한 확고한 시도들이었다. 이길보라 감독은 "남들과 비교하기보다는 각자의 삶에서 소중한 것을 찾"는 암스테르담이라는 도시에 편안하게 몸을 내맡겼다.
... 한국에서 매일같이 안부처럼 들었던 말을 여기서는 듣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내니 몸에 켜켜이 쌓여 있던 억압의 겹들이 보였다. 하나둘씩 그 긴장을 걷어내는 연습을 했다. 숨을 크게 내쉬고 공원에 누워 하늘을 보면 이렇게 살아도 정말 괜찮구나,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네덜란드라는 제3의 터전에서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는 애인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계기를 갖기도 한다. 한국과 일본엔 없지만 네덜란드에는 있는 '파트너십' 제도를 활용해, 이곳에서 정착할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 것이다. 그에 앞서 얼떨결에 '속전속결 상견례'를 진행하기도 하는데, 그 과정이 퍽 특별하다.
일본의 한 식당에서 마주앉은 두 가족은 일본어를 영어로, 영어를 다시 한국어로, 한국어를 수어로 옮기며 느릿느릿 서로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데,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다 같이 눈물을 터트리고 만다. 언어와 선입견이라는 장벽을 넘어서, 서로를 존중하고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는 장면이다.
... (애인의) 어머니는 요새 한국 수어를 배우고 있는데 일본 수어와 많이 비슷하다며 주먹을 쥐고 검지와 엄지를 두 번 붙였다. '같다'라는 뜻의 한국 수어이자 일본 수어였다. 어머니가 손을 움직여 수어를 한 순간, 가슴이 벅찼다. 새로운 방식의 관계 맺음이 어쩌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이게 '기본'이고 당연한 '디폴트값'이다.
이처럼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에는 각기 다른 나라, 그리고 나와 타인 사이에 놓인 벽을 허물기 위해 부단히 고민하고, 깨지고, 끝내 길을 만들어낸 이길보라 감독의 경험담이 촘촘히 담겨 있다. 이 책은 '경계를 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누군가를 향해, 혹은 삶의 여러 길목에 그어놓은 선들이 사실 불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길보라 감독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이라는 생경한 도시를 배경으로 글을 풀어내고 있지만, 새로운 세상과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한 '시도와 모험'을 한국에서라고 할 수 없는 건 아니다. 경계를 없애는 상상이 부족한 곳이기에, 오히려 더더욱 이같은 시도가 필요하다. 그 모험 앞에 이 책은 좋은 지침서가 되어 줄 거다. 때로 막막할 땐 이 여성 청년이 '자신의 속도대로' 먼저 걸어온 이 길을 보기를, 그리하여 '다름'을 알아갈 용기를 얻기를 바란다.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 삶의 지도를 확장하는 배움의 기록
이길보라 (지은이),
문학동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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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배경이 내가 되지 않는 곳에서 '나로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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