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읍의 '커피앤지인'에서 만난 블루·동현·수수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자연농>이라는 다큐가 있어요. 그걸 찍은 분들이 일본에 살고 있는데, 작년 말에 한국으로 상영회를 하러 온다고 해서 구례에서도 카페를 빌려 상영회를 열었어요. 그 당시 저는 활동을 거의 안 하고 있던 때라 지역 사정을 잘 아는 수수와 같이 행사를 준비했죠. 동현과는 얼굴 정도만 아는 사이였는데 영화를 보고 큰 영감을 받았는지 저한테 다짜고짜 이러더라고요. 우리, 땅을 구해서 같이 농사를 지어봅시다!(웃음)" (블루)
강수희와 패트릭 라이든이 수년에 걸쳐 미국과 한국, 일본 등지를 돌아다니며 만든 다큐멘터리 <자연농(final straw)>은 자연에 순응하는 방식으로 농사짓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정직한 눈빛, 담백하고 맑은 표정의 농부들이 등장하는 장면 장면이 유독 반짝거리는 작품이다.
유례없는 생태환경의 위기에 처한 지구별에서 다양한 생명이 공존하는 삶은 어떻게 가능한지 성찰하게 만드는 이 영화를 보면서, 아마도 많은 이들이 반성을 하고 또 감동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받은 영감이나 울림을 일상에 끌어들여 구체화하는 사람이 어디 그리 흔한가. 그러고 보면 공동농사를 제안한 동현이나 군말 없이 그에 화답한 블루와 수수, 이 세 사람은 이미 함께할 준비가 되어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 상영 전에 계기가 있긴 했어요. 작년 8월에 수수가 활동하던 '지리산사람들'에서 기후위기를 주제로 생태인문연속강좌를 열었거든요. 그때 강사로 오신 네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안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 같아요. 기후위기니 생태적 삶이니 하는 것에 관심도 없고 잘 몰랐었는데, 강의를 들으면서부터 이대로는 안 된다는 위기의식이 생기더라고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고민도 하기 시작했고요.
그러던 차에 <자연농>을 보게 됐고, '그래, 이거야' 하는 마음에 농사를 짓자고 제안한 겁니다. 농부의 아들로 자라면서 어깨너머로 본 게 있으니까, 이 정도는 내가 실천할 수 있겠다 싶어서요." (동현)
"생태인문강좌를 준비하면서 행사 장소로 '구례 백두대간 생태교육장'을 마음에 두고 있었어요. 군에서 과연 쉽게 허가를 내줄지 의문이었는데, 마침 동현이 생태교육장에서 근무하고 있어 일이 잘 풀렸죠. 그때 장소를 섭외하는 과정에서 동현과 기후위기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했고요,
강좌 끝나고 나서도 기후위기 관련해 지역에서 뭔가 움직임을 만들어보자는 얘기를 주고받았어요. 그런 시간들이 쌓여서 지금 이렇게 같이 농사도 짓고, 구례오일장에서 기후위기를 알리는 캠페인도 진행하게 된 게 아닐까요." (수수)
기후위기 시대에 '자연농부'로 산다는 것
공무원인 동현은 구례에서 일한 지 12년째다. 시골에 살면서도 작은 텃밭 하나 건사해본 적 없는 그에게 8백 평 농사일을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일일이 손으로 하기란 만만치 않다. '땅을 갈지 않고 비료와 농약을 치지 않으며 풀 정리도 최소화한다'는 자연농의 기본 원칙을 따르자니 곱절로 힘이 든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그에게 자연농이란 단지 '농법'이 아닌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자연농의 창시자로 알려진 후쿠오카 마사노부는 '일물일사(一物一事)', 즉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에게도 고유의 역할이 있고, 그것들이 각각 자기 역할을 하면서 공생할 때 전체 균형이 유지된다고 보았어요. 반면에 관행농은 자기가 키우려는 작물 외에는 다 제거 대상으로 보고 없애려 하죠. 기후위기 역시 인간을 중심에 놓고 다른 것들은 배제한 결과가 아닐까요? 저는 생태환경이 무너진 지금이야말로 자연농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동현)
구례에 내려오기 전, 양평 두물머리에서 4대강 건설 반대 싸움이 한창일 때 땅을 지키려는 농부들과 연대해 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있는 블루는, 원래 자연농보다 유기농을 신뢰하던 사람이다. 자연농을 한다면서 논밭을 풀밭으로 만들기 일쑤인 이들을 보면 콧방귀가 절로 나왔다고. 그 시절 그의 머릿속엔 '자연농=방치농'이라는 생각이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어느 해엔가 유기농 농사를 짓는 고추밭에 병이 돈 적이 있어요. 마을의 거의 모든 고추밭이 엉망이 됐는데, 풀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정글로 변해버린 한 어르신 밭만 괜찮더라고요.
유기농 하는 사람들은 비료뿐 아니라 제초제도 환경에 좋다는 걸 직접 만들어서 뿌려요. 벌레도 손으로 잡아주고요. 그렇게 공을 들여 키운 고추가 병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던 거죠. 오히려 풀이며 곤충과 함께 자란 고추는 살아남았고요. 그게 저한테는 큰 충격이었고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됐어요. 어떤 생명이든 다른 생명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걸 그때 깨달은 거 같아요." (블루)
그 '사건'을 계기로 블루는 자연농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자연농이야말로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농사법이자 삶의 철학이라는 믿음이 단단해졌다. 동현의 갑작스러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그래서였다.
이제는 책보다 땅을 통해 배우고 머리가 아닌 몸으로 확인해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고 할까. 막상 시작하고 나서야 직장 일과 농사를 병행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블루는 그 또한 감내해야 할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인다. 흙을 밟을 때 가장 행복해하는 '나'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살아가는 위안이 되고 힘이 되기에.
만나고 엮이는 것이 진정한 '공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