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평론가 최규성 씨는 최근 560쪽이 넘는 <빽판의 전성시대>를 발간했다.
최규성
- 이 책을 출간하게 된 배경이 2018년 청계천박물관에서 열었던 <빽판의 시대> 전시에서 출발했다 들었다. 전시 이후 책을 나오기까지 기억나는 에피소드나 어려웠던 점이 있었나?
"2018년 청계천박물관에서 <빽판의 시대> 전시를 기획하면서 도움을 요청해 왔습니다. 전시된 빽판들을 보며 많은 관람객들이 추억을 소환하며 행복해 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빽판에게 처음으로 시민권을 부여하는 의식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시 준비 과정에서 빽판의 유입 역사에 대한 논고를 쓰면서 빽판이 한국의 팝송 유입 역사이면서 팝 문화 형성의 과정을 증언하는 의미 있는 자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빽판은 숨기고 싶은 흑역사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아무도 정리하지 않은 미개척지란 점도 매력적인 연구 대상으로 다가왔습니다. 문득 불법 빽판에 대한 인식의 재발견을 하면서 책으로 내고 싶은 욕망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막상 책을 쓰려니 제가 소장한 음반으로는 전체 시대를 다루기엔 부족해 서울 회현 지하상가, 동묘, 청계천을 비롯해 인천 부평, 경기도 동두천, 파주, 그리고 대전, 전남 무안, 부산 등 전국을 찾아다니며 빽판을 수집했습니다. 처음엔 빽판을 구하면 원판과 비교해 보여주려 동시에 수집을 시도했습니다.
그 바람에 제 주머니가 텅텅 빌 정도로 비용이 많이 들었는데 정작 책에는 수집한 빽판 1만여 장이 너무 방대해 4천 장 정도만 선별하는 작업이 더 어려웠습니다. 원판도 중요한 음반만 선별했습니다. 수집 과정에 보니 과거와는 달리 원판은 돈만 있으면 쉽게 구할 수 있지만 빽판은 돈이 있어도 구할 곳이 없어 정말 어려웠습니다. 끝내 구하지 못해 소개하지 못한 빽판도 많은 점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 빽판은 트로트 일변도의 대중음악에 다양성을 수혈하여 지금의 발전을 이룬 자양분"이라고 말했다. 지금같이 저작권이 중요한 시대에 살아가는 젊은 세대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당시에는 불법의 개념이 전혀 없었나? 당시 상황을 조금 더 부연 설명해 달라.
"솔직히 말하면 한국 대중에게 지금처럼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확립된 것은 불과 10여 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디지털 시대가 시작된 2000년대 초반에도 불법 MP3가 빽판이 그랬던 것처럼 국내 음반시장을 파괴시켰죠. 블로그, 음악카페, 싸이월드 등 인터넷 커뮤니티가 활성화되면서 불법 음원뿐 아니라 사진 도용 등 광범위한 저작권 위반이 이뤄져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1973년부터 빽판의 전성시대가 마감되는 1990년대 중반까지 20여 년 동안 빽판을 직접 구입하고 음악을 향유했던 증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금지되어 들을 수 없게 된 음악을 구해 듣는 것이 중요했지 불법 제작된 빽판이 문제라는 개념조차 희박했던 시대였습니다.
음질과 음반의 품질이 열악한 점은 불만이었지만 금지된 노래가 수록되어 있고 음반가격이 정식 음반에 비해 3~5배 저렴했던 점도 빽판의 보급과 파급에 일조했던 요인이라 생각합니다.
1972년 음반법 제정 이후에도 실제로 동네는 물론이고 서울 명동의 유명 백화점 음반매장에는 1970년대 말까지 신보로 나온 빽판이 버젓이 진열대의 중심을 장식했을 정도였습니다. 당시의 빽판 라벨에는 정부에서 정식 발행했던 납세필증 인지와 지방자치단체의 검인 인지까지 붙여 판매했는데 저작권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던 어설픈 시대의 해프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단속이 강화된 것은 빽판의 팽창이 너무 심해 국내 음반시장의 60~70%를 잠식할 정도로 피해를 주었던 1980년대에 들어서야 전수조사를 정기적으로 강력하게 시행했습니다. 당시 언론을 통해 불법 음반류들을 폐기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종종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빽판의 존재가 한국 대중음악의 다양성을 수형하는 자양분 역할을 한 것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엄연한 팩트입니다. 당시 외국 팝송을 접할 수 있는 통로는 라디오와 빽판, 그리고 음악다방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제가 <빽판의 전성시대> 책을 집필한 진짜 이유는 중장년들에게 추억의 대상이라는 점도 어느 작용했지만 단순히 빽판과 팝송 자체를 심도 깊게 소개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빽판에 담긴 다양한 장르의 팝송들이 어느 시점에 한국에 유입되었고, 어떤 팝송들이 한국 대중의 사랑을 받았고, 어떤 한국 가수가 그 팝송들을 번안했는지에 집중하려 노력했습니다.
실제로 60~70년대 국내 대중음악계는 팝송이 주류음악으로 대접받았을 정도로 번안곡 전성시대였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 이후 미군부대를 통해 물밀듯이 유입되었던 서양의 장르 음악들이 담긴 원판을 복사해 제작된 빽판은 트로트 일변도의 한국대중음악에 다양성을 수혈하며 성장과 발전을 위한 자양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60~80년대 한국 대중음악은 서구 장르가 유입되어 다양한 장르 음악이 공존했었으니까요. 또한 빽판은 전쟁으로 붕괴 직전이었던 국내 음반시장의 재건에도 상당 부분 공헌했습니다. 초창기의 빽판들은 춤바람 난 50년대의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듯 각종 사교춤을 추기 위한 댄스용 연주음반의 인기가 절대적이었습니다.
60~70년대는 더욱 다양해진 빽판을 통해 접한 서구 장르음악에 대한 갈증으로 인해 팝송을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잡지들과 방송, 다운타운 디제이(DJ)들이 등장하면서 형성된 팝 문화에 절대적으로 기여했습니다.
80년대는 라이선스 음반이 정착되기 시작한 국내 음반 산업을 황폐화시켰을 정도로 과도한 팽창이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90년대 들어서는 합법 라이선스가 완전히 정착하고 또한 아날로그시대의 종말과 더불어 빽판의 전성시대도 막을 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