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연필로 그린 한나 아렌트
이인미
만약 정치적 장면에서 용서가 없다면, 행위를 잘못할세라 다들 몸만 사리고 있을 것이다. 가만 있으면 중간 가겠지, 생각하면서. 그러므로, 정치적 활동이 활발해지려면 용서 또한 활발해져야 한다. 단! 예외가 있다.
정치적 활동을 활발하게 하려는 명분을 위해, 모든 경우에 무차별적으로 다 용서를 실시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분명히 밝혀두었다. "이 용서는 극단적인 범죄나 의도적인 악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예컨대 독일의 유대인대학살(홀로코스트), 일본의 위안부 강제동원 문제 같은 극단적이고 의도적인 전쟁범죄에서는 '사과, 처벌, 배상' 등이 먼저 공개적으로 나오고 뒤이어 용서가 구현되는 게 맞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 경우는 보상(reward) 말고 배상(compensation)이란 단어를 써야 하리라.
행위의 예측할 수 없음, 약속을 부르다
행위에는 돌이킬 수 없다는 속성 외에 또다른 중요한 속성이 있다. 그것은 '예측할 수 없음'이다. 우리는 오늘 만나는 낯선 사람이 나와 찬반토론을 하다가 나를 해치지 않으리란 것을, 무슨 근거로 믿는가?
정치이론가로서 아렌트는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의 마음, 다시 말해 '인간 마음의 어두움'을 어차피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건 성악설 같은 게 아니다. 어두움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남들은 물론 나 자신도) 알 수 없다는 것이 어두움의 핵심적 의미다.
인류역사가 수천 년(혹은, 원시인까지 포함하면 수만 년?)에 이르지만, 인간 마음의 어두움은 아직 완전히 다 밝혀지지 않았다. 어쩌면 앞으로도 수만 년이 지나도록 인간 마음의 어두움은 100% 말끔하게 공개될 수 없으리라. 성 어거스틴(St. Augustine) 같은 학식과 덕망이 드높은 학자도 신 앞에서 자기가 자기에게 문제거리라고 고백한 바 있다(I have become a problem to myself). '내 마음 나도 몰라'의 다른 버전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인간의 마음 어딘가엔 어두운 구석이 있다. 누구한테나 있다. 그 어두움은 낱낱이 밝혀질 수 없다. 어두움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인간이 남들과 함께 공통의 관심사를 토론하고 (상대의 행위를 예측하면서) 추진하려면 일종의 인위적 장치가 필요하다. 그 장치, 그것이 바로 약속이다. 공적 영역에서 자유롭게, 공정하게 그리고 안전하게 우리가 다같이 정치적 삶을 삽시다, 이런 것이 곧 약속이다.
약속에는 직업정치인들이 투표일을 앞두고 내어놓는 공약은 물론이거니와, 사사로운 장면이 아닌 공적인 장면에서 인간들이 맺는 모든 종류의 계약이 다 포함된다. 그리고, 약속은 맺는 것 못지않게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약속에서는 신뢰가 중요하게 대두된다. 신뢰를 무겁게 여기는 마음 위에서 약속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약속은 행위에 안정감을 보장해준다. 저 사람이 약속대로 행위하리란 것이 믿어지면, 덜 불안하다.
기자는 "
나는 로봇이 아닙니다, 왜냐면"이라는 글 말미에서 예고편을 올렸었다. 모름지기 예고편은, 다름 아닌 본편의 존재로 신뢰도가 입증된다. 단 한 명의 독자라 할지라도 본편을 기다리는 이가 있다면, 기자는 그의 기다림에 반응행위를 보여야 한다. 그래야 약속의 정치적 의미를 제대로 구현한 것이 된다. 정치적 의미에서 약속은, 약속을 했다는 것으로 가치가 증명되는 게 아니라, 약속의 내용에 대한 책임있는 구현으로 가치가 증명된다.
정리해보기로 하자. 행위의 돌이킬 수 없는 속성 때문에 나타나게 되는 용서는 공적 영역에서 인간들이 자신감있게 행위를 펼칠 수 있도록 해준다. 정치영역에서 행위가 활발히 연속되려면 기본적으로 '용서'라는 '엔진'이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공통수준으로 장착돼있어야 한다. 모두가 용서할 준비를 하고 행위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행위의 속성 때문에 요청되는 약속은 서로의 신뢰 속에 인간들이 행위를 과감히 실행할 수 있도록 해준다. 약속은 책임있는 행위를 권장하는, 무겁기 짝이 없는 활동이다.
용서와 약속은 한 사회의 정치적 품격을 드러내는 지수로 볼 수 있는 점이 있다.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정치영역에서 이 두 가지가 올바르게 발생하는지, 적합하게 수용되는지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의 정치적 삶의 품격, 품위를 도모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서 말이다. 그리고, 동시에, 나 자신이 끝없이 용서하고 무겁게 약속하는지에 대하여 성찰하면 더더욱 좋다.
* 함께 읽을 책: <인간의 조건>, <책임과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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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정치수업(위즈덤하우스), 해나 아렌트의 행위이론과 시민 정치(커뮤니케이션북스), 박원순의 죽음과 시민의 침묵(지식공작소), 환경살림 80가지(2022세종도서, 신앙과지성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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