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1월7일 밧줄에 묶인 김 부장이 권총을 든 채 박 전 대통령 시해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80보도사진연감<한겨레21>
전두환 세력은 이런 분위기를 연출 또는 조장하면서 김재규 재판을 서둘렀다. 10ㆍ26거사로 '서울의 봄'을 맞은 여야 정당은 막상 유신체제의 핵을 제거한 당사자의 재판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차기집권에 대해서만 동분서주하는 형국이였다. 재야세력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법원은 10ㆍ26거사의 마지막 심판인 상고심을 1980년 5월 20일 열기로 하였다. 이 날짜는 정략적으로 잡혀진 것이었다. 신군부는 5월 17일 새벽 쿠데타를 일으켜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 선포하고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표,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및 옥내외 집회, 시위의 금지, 언론ㆍ출판ㆍ보도 및 방송의 사전검열. 각 대학의 휴교령 조치를 취했다.
이에 앞서 김대중ㆍ김종필 등 26명의 정치인을 합동수사본부가 연행하고, 김영삼을 가택연금하는 등 일대 정치적 탄압을 자행했다. 국회도 계엄군이 동원되어 봉쇄하였다. 18일 오전 광주에서는 전남대생들이 계엄해제와 전두환 구속 등을 요구하며 계엄군에 맞섰다. 광주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신군부가 예비한 시나리오대로 쿠데타 3일 뒤, 2심선고 113일 만에 서울형사지방법원 대법정에서 김재규 등의 상고심 재판이 열렸다. 내외의 관심은 쿠데타 실세들이 연출한 계엄령 전국확대라는 정치드라마에 쏠리는 것이 당연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재판장 이영섭 대법원장, 주심 유태흥ㆍ주재황ㆍ양병호ㆍ임항준ㆍ안병수ㆍ김윤행ㆍ이일규ㆍ김용철ㆍ정태원ㆍ서윤홍 대법원판사였다. 대법원장을 포함한 14명의 대법원판사 중 민문기ㆍ한환진ㆍ나길조는 해외 출장으로 선고 공판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대법원 판사들은 하나 같이 유신정권에서 임명된 대법관들이다. 8명의 피고인 중 박흥수는 현역신분이어서 단심으로 사형이 확정되고, 7명만이 상고심을 받게 되었다.
선고공판은 김재규 등 7명의 피고인은 출정시키지 않고, 피고인의 가족 11명과 보도진, 기관원 등 1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상오 10시 8분, 재판장 이영섭 대법원장의 개정선언으로 막이 올랐다.
재판장은 판결 주문을 말하기 전에 피고인들과 변호인단이 제출한 「상고이유서」의 주장을 요약해서 설명했다. 이에 앞서 이돈명 변호사가 골격을 쓰고 변호인단이 수 차례에 걸쳐 다듬은 173쪽의 「상고이유서」를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상고심에서는 피고인들의 '최후진술'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