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전중앙정보부장의 박정희암살 현장검증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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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역사의 현장으로 돌아가 본다.
이번에는 박정희와 차지철을 저격한 다음의 과정을 김재규의 육성으로 들어보자.
1979년 10월 28일 합동수사본부에서 작성한 첫 '진술서'다. 진술서는 자신의 경력을 비롯 거사 과정이 담겨 있다. 여기서는 권총으로 박ㆍ차를 쏜 이후부터 '현장중계' 한다.
19시 42분경 현장을 이탈하여 맨발과 Y셔츠 바람에 집무실로 뛰어와 차량 대기실에서 "차 어디 갔어, 손님 모시고 나오라"고 외쳤습니다.
19시 45분, 본인은 본인 승용차에 육군참모총장, 김정섭차관보, 박흥주 수행비서와 동승하는 순간 본인이 총장에게 "큰일났소. 빨리 차에 타시오."했다. 승차 후 차 안에서 "무슨 일입니까" 묻길래 본인은 "큰일이 났어. 정보부로 가자"고 하자 총장이 "무슨 일이 났소" 하고 물었다.
이때 본인이 좌수 엄지 손가락으로 표시하며 우수 인지로 'X' 표시를(각하 살해됐다는 표시)하면서 저격당했다고 하자 총장이 "각하가 돌아가셨습니까" 하며 묻길래 본인이 "보안 유지를 해야 한다. 적이 알면 큰일이다."고 하면서 몹시 당황하여 경호차가 오는지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총장이 "외부의 침입이요, 내부의 일이요" 물었으나 본인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본인은 차를 부(部, 정보부)로 가자고 하자 총장이 "육본 벙커로 갑시다" 하므로 이때 운전사는 미8군 영내를 통과하여 20시 05분 육본에 있는 B-2 벙커에 도착하여 벙커 참모총장실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본인은 김정섭 차장보에게 지시하여 청와대 실장에게 전화로 "이쪽 형편이 갈 형편이 못됩니다" 하자 "이리 오시오 다 끝났는데 거기 무엇하러 갑니까. 여기 다 모였으니 총리 모시고 오시오"라고 하자 김실장은 약간 전화를 멈추었습니다만 본인이 육군총장을 인질로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응락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전화 통화를 끝냈습니다.
그리고 총장은 상황실 방으로 왔다갔다하여 무슨 조치를 취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22시 30분경 김계원 비서실장, 총리, 내무, 유혁인, 법무장관 등이 도착하였습니다. 법무부 장관이 본인에게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자 본인은 "지금 대통령이 유고입니다. 이것은 중대한 사태로서 경계를 강화해야 되겠고 국내 유혈 사건도 막아야 하기 때문에 2,3일간 보안을 단호히 유지해야 하고 각의를 열어 계엄을 선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유병현 장군이 "위컴 대장이 미국에 가 있으니 제가 참모장에게 전달하면 됩니다. 외교부 장관이 내일 아침 미국 대사를 불러서 제가 통보하겠습니다" 했다. 이때 좀 늦게 도착한 문공장관이 "비상계엄의 사유를 어떻게 할까요" 하여 본인은 "소련의 브레즈네프가 사망한 지 여러 날이 되어도 아직 보안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보안을 지켜서 비상계엄의 사유는 유고(有故)로 하면 될 것입니다."
국방부장관실로 국무총리 이하 국방부장관과 육군총장이 자리를 옮기고 22시 55분경 본인이 김실장을 총장실 내에 있는 화장실로 데리고 들어가 "사태 수습이 급선무입니다. 보안을 유지해야 합니다"하여 "최단 시일 내에 계엄사령부 간판을 혁명위원회 간판으로 바꾸어 달도록 하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22시 40분경 총장실에서 국방부 장관실로 옮겨 23시 각의를 소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유혁인(정무제1수석 비서관)이가 중앙청 근처에서 기자들이 취재 움직임이 있는 것 같다고 하여 본인이 외신기자의 보안유지를 위해 전재덕 차장에게 전화를 걸어 체크하라고 2차장보인 김정섭에게 지시하였습니다.
10월 27일 0시 40분경 국방장관 부속실 요원이 와서 김비서실장이 찾는다고 하여 장관실 입구 부속실로 나가보니 대기한 헌병 2명에 의해 체포당하였습니다. (주석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