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묘의 일부.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다.
김종성
김재규가 자신의 조상을 현창하기 위해 국사편찬위원회(장)에게 먼저 제안한 것인지, 어용학자들이 아첨용으로 먼저 제안한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만장일치로 유응부를 빼고 사6신의 자리에 김문기를 넣기로 하고,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김문기까지 모셔져 '사칠신'의 묘역이 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이같은 처사가 알려지면서 이재호ㆍ이가원ㆍ김성균ㆍ이재범ㆍ정복구 교수 등이 곧바로 반론을 제기하고 시정을 요구했으나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사태가 불거지게 된 것은 일부 어용사학자들이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한 권력자의 사문(私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김재규다)에 영합했기 때문임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박근혜 정권 말기에 어용학자들이 왜곡한 역사교과서를 국편으로 만들려던 시도는 1970년대 중정부장을 꼬득여(혹은 지시받고) 사육신을 교체하려던 수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재규 사후인 1982년 11월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이현종)는 심의 끝에 "종래의 사육신 구성을 변경한 바 없다"고 번명하였다.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말이 나돌았다.
주석
14> 이재호, 『조선사 3대논쟁』, 20쪽, 역사의 아침, 2008.
15> 앞의 책, 16쪽.
16> 앞의 책, 69~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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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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