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항쟁
진실위 자료사진
부산시민들과 학생들의 유신체제에 대한 항의시위 소식이 마산에 전해지면서 학생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부산에서 버스로 불과 1시간 거리에 있는 마산은 생활권이 부산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부산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은 곧바로 알려지게 되었다.
경남대생 5백여 명은 18일 오후 "지금 부산에서는 우리의 학우들이 유신독재에 항거하여 피를 흘리고 있다", "3ㆍ15의거의 정신을 되살리자"면서 시위를 벌이고, 이중 일부 학생들이 시내에 진출했다. 학생들이 무학초등학교 앞에서 경찰에 난폭하게 연행되자 시민들까지 합세하여 공화당사를 박살내고 양덕파출소를 파괴했다.
1960년 3월 이래 19년 만의 항쟁이었다.
시위군중들은 어둠이 짙어갈수록 더욱 수가 늘고 격렬해져 산호동파출소가 불탔으며, 이어 북마산파출소, 오동동파출소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밤 9시 30분경 경찰지원병이 늘어나 시위대들이 점거하고 있던 중심가 남성동파출소를 중심으로 시위군중들과 대치하게 되었다.
마산 시민ㆍ학생들의 시위는 19일 저녁에는 수출자유지역의 노동자와 고등학생들까지 합세, 더욱 격렬해졌다. 19일 새벽 3시까지 학생ㆍ시민들의 시위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부산시위가 마산으로 옮겨붙어 더욱 격렬한 양상으로 치닫자 정부는 20일 정오를 기해 마산지역 작전사령관 명의로 마산시 및 창원출장소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위수령 발동과 함께 마산시내에 즉각 군을 진주시켜 시청ㆍ경찰서 등 정부기관과 언론기관, 각 대학교에 대한 경계에 들어갔다.
4일 간의 시민ㆍ학생 봉기를 통하여 부산에서 1,058명, 마산에서 505명 등 총 1,563명이 연행되고, 이중에 학생ㆍ시민 87명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으며, 651명이 즉결심판에 넘겨지는 등 극심한 수난을 겪었다. 부마항쟁은 대학생과 일부 고등학생, 시민ㆍ노동자들이 참여하는 시민항쟁으로 전개되었다.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 제명을 계기로 폭발한 부마민중항쟁은 계엄령과 위수령으로 일시적으로 막을 내렸지만 불씨는 사그라들지 않은 채 17일에는 이화여대, 19일에는 서울대와 전남대, 24일에는 계명대 등 학생시위가 수그러들 줄 모르고 전국으로 확산되고, 마침내 10ㆍ26을 촉발시키는 뇌관이 되었다.
주석
7> 「김재규 옥중 수양록」, 김성태 엮음, 『의사 김재규』, 197~198쪽, 매직하우스, 2012.
8> 앞의 책, 196~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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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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