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박정희 대통령 초도 순시를 앞두고 현장 점검에 나선 경호실장 차지철. 박정희가 앉을 자리에 미리 앉아 자세를 취한 모습이다. 차지철은 “각하를 지키는 것이 국가를 지키는 것이다”라는 표어를 붙여놓고 경호실을 강력한 권력기관으로 키웠다. 수도경비사령부조차 경호실 휘하에 둘 정도였다. 전두환과 노태우도 작전차장보와 행정차장보로 청와대 경호실을 거쳐갔다. 혹자는 10.26이 터진 이유를 김재규와 차지철의 충성 경쟁 또는 권력 투쟁으로 꼽기도 한다. 그의 오만함은 주변의 반발을 불러 10.26 직후 박정희를 저격한 사람이 차지철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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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선거와 신민당 사태 이후 차지철의 위세가 더욱 강화되었다.
그는 두 사건이 모두 김재규의 중정이 무능해서 일어난 것으로 박정희에게 보고하고, 대통령이 이를 믿는 것 같으니까, 심중을 헤아린 차지철은 앞뒤 가리지 않고 설쳤다.
차지철이 실세 부통령이라는 세간의 '작위'를 받게된 배경은 무엇일까.
차지철이 정치에 본격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78년 말께부터였다. 10년 간 대통령비서실장을 역임한 김정렴이 주일대사로 전임되고 주중대사로 있던 김계원이 78년 12월 신임실장으로 들어올 무렵부터였다.
신임 김 실장은 육참총장, 중앙정보부장 등 요직을 거쳤지만, 8년간의 주중대사 생활을 계속하다 78년 9월 귀국한 관계로 국내물정에는 지극히 어두운 편이었다. 46년 연전상과(延專商科)를 졸업한 그는 성격적으로도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절대권력자와 가장 가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정치성이 물씬 풍길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만일 그 자리에서 충분한 역할을 제대로 못 해낼 경우 누군가가 그 역할과 기능을 대신해 주어야 하는데 차지철이 이 간극을 메운 것이다.
그는 4선의원에 외무ㆍ내무위원장까지 역임, 정치의 경험과 관록을 이미 10여 년간 쌓은 바 있다. 그가 국회의원이었을 때도 대통령과 관련된 어떤 역할을 할 때는 이를 은근한 방법으로 언론기관에 흘리곤 했다. (주석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