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5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김영삼 신민당 총재을 접견하고 있다.
e-영상역사관
재야와 학생들은 어용야당, 사쿠라 당수라고 야유하고, 당내에서도 선명노선을 바라는 분위기가 높아졌다. 뒷날 드러나게 되었지만 차지철은 이철승을 밀었지만, 중정은 과거와는 달리 야당의 전당대회를 방치한 것이다. 그래선지 이변이 일어났다. 김영삼이 이철승을 누르고 총재에 당선되었다.
신민당의 김영삼체제 출범은 정계의 폭풍을 예고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김영삼 체제가 등장하자 새로운 공작을 개시했다. 그 하나가 김영삼이 취임 후 처음으로 가진 6월 11일의 외신기자클럽 초청연설에서 남북한의 긴장완화를 위해 '김일성과 면담용의'를 표명한 데 대해, 북한이 김일성의 이름으로 환영담화를 낸 것을 빌미로 삼았다.
김영삼의 이 발언과 관련하여 상이군경과 반공청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마포 신민당 당사에 난입하여 당원들을 폭행하는가 하면, 여당에서도 발언취소를 요구하는 등 이 사건은 정치문제로 비화되었다.
다른 하나는 신민당의 일부 비주류 측이 몇 사람의 당원자격에 대한 유권해석을 질의한 데 대해 중앙선관위가 국회의원 선거권이 없는 자는 정당의 당원이 될 자격이 없고, 선거법으로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고 그 집행이 종료된 후 6년이 경과하지 아니한 자는 국회의원 선거권이 없다고 유권 해석하여 정계에 새로운 불씨가 되었다.
주석
1> 서중석, 『대한민국 선거 이야기』, 189쪽, 역사비평사, 2008.
2> 천호영, 「10ㆍ26과 김재규의 진실」, 『말』, 1993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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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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