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현서원. 경기도 용인시 한국민속촌 내부에 있다.
김종성
대한민국 역사에서 조선시대 역사와 비슷하게 전개되는 부분이 있다. 그중 하나가 사립학교 문제다. 사학 비리로 불리는 이 문제는 조선시대에도 상당히 심각했다. 그래서 나온 유명한 한 장면이 음력으로는 고종 8년 3월 20일 자, 양력으로는 1871년 5월 9일 자로 <고종실록>에 기록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유명한 하교다.
"성묘(聖廟)의 동서쪽에 배향하는 현자들과 충절 및 대의를 탁월하게 빛낸 분을 모시는 서원으로서, 실로 백세토록 숭상할 만한 47개 서원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전부 다 제사를 그만두고 현판을 철거하도록 하라."
공자를 모시는 성균관 대성전에 공자와 함께 배향된 유교 현인들과 더불어, 충절과 대의로 이름을 남긴 사람들을 추모하는 서원 중에서 앞으로도 계속 받들 필요가 있는 47개 서원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다 철폐하라는 명령이었다. 이것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다.
오늘날의 학교에서는 교육이 우선이지만, 옛날 학교에서는 제사가 우선이었다. 국립대학인 성균관을 비롯해 전국 각지의 서원을 방문해보면, 명륜당 같은 강의실보다 추모 공간인 사당이 더 중요하게 배치됐음을 느낄 수 있다.
서울 대학로 인근인 성균관의 경우에는, 대성전이 전면에 있고 명륜당이 후면에 있다. 전묘후학(前廟後學)의 구조를 띤 것이다. 묘(墓)는 무덤이고, 묘(廟)는 사당이다. 묘(廟)를 강의실보다 중시한 것은 조선시대 교육에서 제사가 차지한 위상을 짐작게 한다.
오늘날의 사립학교에 건학 이념이 있듯, 옛날 사립학교인 서원에도 동일한 게 있었다. 서원의 건학 이념은 그 서원이 누구를 제사 지내는가에서 드러났다. 일례로 경기도 용인시 한국민속촌 내에 있는 충현서원의 경우, 정몽주·오달제·민영환·김석진 4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정몽주는 고려왕조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달제는 병자호란 때 화친을 반대하다가 홍익한·윤집과 함께 청나라에 끌려간 삼학사의 일원이다. 민영환은 1905년 을사늑약 때 자결로써 충심을 표시했다. 김석진은 1910년 국권침탈 때 동일한 방법으로 충성을 나타냈다. 망국의 위기에 처한 나라에 대해 의리를 지킨 이 4인을 모셨다는 것은 충현서원의 건립자들이 무엇을 중시하는 사람들이었는지를 알려준다.
서울 도봉산의 도봉서원에서는 조광조와 송시열을 제사 지냈다. 두 유학자를 모신 이유는 여럿 있었겠지만, 그중 하나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두 사람 다 강경파 유학자들이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유교 근본주의자들이었다. 도봉서원의 건학 이념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1871년 5월 9일의 서원철폐령 당시 흥선대원군은 누구를 제사 지내는가를 기준으로 서원의 존폐 여부를 결정했다. 요즘 말로 하면, 건학 이념을 기준으로 서원의 운명을 결정했던 것이다. 이 철폐령에서 살아남은 곳은 안향을 모시는 경북 영주의 소수서원, 이황을 모시는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 같은 47곳이었다. 충현서원과 도봉서원은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사학재단들의 편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