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회관 앞의 주시경 선생 흉상한글회관 앞의 주시경 선생 흉상
일제의 전방위적인 침략으로 대한제국은 국난의 위기에 치달았다.
을사오적을 비롯하여 의병에 대항하여 각지에 자위단을 파견한 일진회, 한국의 행복을 위해서는 일본과 합방해야 한다는 이용구ㆍ송병준 무리가 날뛰는 반면에는 우국지사들도 적지 않았다.
한국군 해산에 반대하여 자결한 박승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의 안창호ㆍ양기탁ㆍ이회영ㆍ김구ㆍ이동휘ㆍ신채호 등, 스티븐스를 처단한 전명운ㆍ장인환,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매국노 이완용을 습격한 이재명 등 의열지사들이 있었다.
우국지사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고, 매국노를 처단하는 데 생명을 바치거나 육신을 던졌다. 주시경은 방법을 달리 하였다. 나랏말의 연구와 보급에 신명을 걸었다. 국운이 어려워 갈수록 국문연구와 청년 교육에 대한 열정은 더욱 뜨거워져갔다.
1909년 2월에는 상동사립 청년학원에 국어연구학회를 설립하고, 총회에서 "국문을 정리함이 가정을 청소하는 것과 같다"고 역설하였다.
을사늑약 이후 주시경의 국어연구 관련 활동상을 간추린다.
1906년 6월 「대한국어문법」유인물로 내다. 8월 부터 『가정잡지』에 「국문」 연재.
1907년 7월 정부에 '국문연구소' 개설을 청원하여 개설을 이루어 내고, 여름에 상동 청년학원 국어강습소 강사로 출강하여 음학ㆍ도해학ㆍ격분학 등 6개 강의를 맡고, 「국문연구안」 제2회분을 국문연구소에 제출.
1908년 11월 「국어문전음학(國語文典音學)」(62면)을 간행하고, 이 해에 「국문연구안」제3~10회 분을 제출.
1909년 2월 『국문초학』 (44면) 간행하다.
1910년 4월 『국어문법』 간행하다. 『국어문법』은 1898년에 집필한 초고를 보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