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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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기 교수는 <논설 2> 역시 서재필의 작품으로 추정하면서 "그동안 항간에 논설2의 주인공을 주시경으로 보려는 경향은 어째서 생긴 것인가. 그것은 개화기에 국문운동을 필생의 사업으로 펼쳐온 분이 주시경이었기 때문에 그 시절의 모든 국문운동에 주시경이 관여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이 그 원인" 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혔다.
주시경은 그의 사업의 거의 전부가 한글운동이었고 서재필의 한글운동은 그의 개화계몽운동의 한가닥 가지에 불과하였다. 주시경의 주전공은 한글운동이었으나 서재필에게서는 부전공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주전공 우대 성향이 『독립신문』 제1호의 논설 2조차도 주시경의 것으로 보려고 한 것이었다.
다시금 검토해 보자.
『독립신문』 제1호가 간행된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은 33세의 의기발랄한 청장년으로서, 또 미국의 의사요 서양학문을 두루 섭렵한 당당한 개화계몽의 기수로서, 그리고 『독립신문』의 만가지 주인으로서 그 신문을 처음 간행한 인물이었다.
한편 주시경은 개화에 열의를 품고 있으나 아직 21세의 약관이요. 배제학당의 학생으로서 독립신문사에 회계 겸 교보원(校補員)으로 취직이 된 상태였다. 주시경의 열성과 천재성이 아무리 특출하다고 해도 그 시기에 주시경이 그러한 국문의식을 확립하고 논설을 썼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 무렵에 주시경은 배재학당의 학생으로서 서재필의 강의를 듣는 처지였다. (주석 20)
충분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같은 사람이 같은 시기에 대단히 중요한 어휘를, 그것도 핵심적인 용어를 달리 썼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주석
19> 심재기, 「서재필과 한글 발전운동」, 『서재필과 그 시대』, 264~265쪽, 서재필기념사업회, 2003.
20> 앞의 책, 268~2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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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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