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포크 여행 정보1882년 6월 3~9월 8일 귀국시 탐험 여행
,WASHINGTON
보다시피 이 표는 나가사키에서 뉴욕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에 대한 정보를 정리해 놓은 것이오. 주요 경유지에 도착한 날짜, 거리, 머문 시간 등이 기록돼 있음을 알 것이오. 여기 표기된 거리 수치는 일본 고베항으로로부터의 거리라오. 그러니까 나가사키에 표기된 '434마일'은 고베로부터의 거리를 말하는 것이오.
전체적으로 고베에서 뉴욕까지 122일에 걸쳐 1만4206 마일(2만2862km)을 주파했음을 알 수 있소. 귀국 후 제출한 보고서의 일부인데, 놀랍지 않소? 이뿐이 아니오. 현미경으로 들여다 본 것과 같은 정보를 우리는 죄다 수록하였소.
그건 어쨌든, 보다시피 우리는 부산항과 원산항을 경유하였소. 당시 조선은 빗장을 굳게 걸어 잠근 금단의 땅이었고, 더구나 미국과 조선 사이의 초기 접촉 경험은 알다시피 불행한 것이었소.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그러하였고, 1871년 신미양요가 또한 그러하였소.
한국어를 공부했던 영국 외교관
우리 미 해군들은 조선 왕국을 시대의 낙오자, 미개한 나라, 살아 있는 화석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소. 나는 조선을 어떻게 생각했느냐고요? 허허, 그건 말하기 어렵소. 그러나 내가 그 당시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조선어 공부를 시작했다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털어놓을 수는 있소.
공교롭게도 나는 귀임 발령을 받기 직전에 조선어 학습 교본을 구해서 들여다보고 있었소. 책 이름이 또렷이 기억에 남아 있소. < Corean Primer >(한국어 기초)로 스코틀랜드 출신의 목사 존 로스(John Ross)가 쓴 것이었소. 영국 외교관들이 벌써 그 책으로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은 당시 일본 주재 영국 외교관들과의 접촉을 통해서였소.
고베에서는 영국 총영사관의 아스턴(Aston) 영사가, 동경에서는 영국 대사관의 사토우(Satow) 서기관이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소.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동경의 사토우 서기관은 자신을 찾아온 '이동인'이라는 조선 스님에게 개인 지도를 받고 있었다오. 당시 우리 미국인은 아무도 한국어를 몰랐고, 배울 생각을 하는 사람도 없었소. 나는 속으로 '그래 지금도 늦지 않았다, 영국 녀석들을 따라 잡아야겠다'고 결심하였소.
조선어 공부를 막 시작하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귀임 발령이 떨어졌고 시베리아 횡단 준비에 돌입하게 되었던 것이오. 그리하여 나는 한국어(앞으로 '조선' '한국'을 원칙 없이 병용하겠음) 대신 당장 급한 러시아어 회화 공부에 착수했소. 그러나 한국어와 한국에 대한 관심이 마음 속에서 사라진 건 아니었소.
귀가 번쩍 뜨이는 희소식... 수교 조약이라니
고베에서 우리를 태운 미쓰비스 증기선이 나가사키에 도착한 것은 6월 5일이었소. 나가사키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동양의 거점 항구였소. 우리 미국 함선은 늘 거기를 들락거렸고 거기에서 장기간 정박하곤 하였소. 더구나 거기엔 나의 일본 연인이자 나중에 짝이 될 카네(Kane)도 있었소. 하지만 그날 6월 5일은 카네 못지 않게 반가웠던 것이 있었으니 우리의 멋진 군함 스와타라(Swatara) 호였다오. 1900톤급의 무장 함선으로서 8문의 대포를 장착하고 있었소.
바로 어제 도착했다는 스와타라 호가 귀가 번쩍 뜨이는 희소식을 전해주었다오. 다름 아니라, 두 주 전에 조선의 제물포(오늘날 인천)에서 조선과 수교 조약을 맺었다는 것이 아니겠소? 5월 22일 양국의 대표가 제물포 언덕에 가설된 장막 안에서 6본의 조약문, 즉 영문본 3부, 한문본 3부에 인장을 꽉 찍고 서명하였다는 것이었소. 잉크가 겨우 말랐을까 말았을까 한 조약문을 미국 대표 슈펠트 제독이 지참하고 귀국하는 길에 나가사키항에 정박했던 것이라오.
조선 왕국이 서양국가에 최초로 빗장을 열었다는 면에서 조미수호조약은 역사적인 사건이었소. 뿐더러 나 개인으로서는 이로써 조선 착륙의 장애물이 제거된 것이어서 '아, 이렇게 공교로운 행운이 있나' 하고 쾌재를 불렀던 것이오. 우리가 조선과 수교를 한 마당에 일본인의 허가를 받아야 할 일은 없지 않겠소?
나가사키에서 부산까지는 15시간이 걸렸소. 깜깜한 밤을 출렁이는 바다에서 보낸 끝에 장엄한 일출을 보았을 때 우리는 이미 조선 해역에 들어와 있었소. 6월 7일이었소. 부드러운 초여름 바다에 어리는 아침 빛 속에 드러난 조선의 정경은 특별히 아름다웠소. 그때의 인상이 좀처럼 잊히지 않소. 그러나 우리의 보고서에는 그런 감정 같은 것은 배제한 채 메마른 정보를 기록하였소.
"나가사키에서 출항하여 시속 10 노트의 속도로 15시간 동안 항해한 끝에 날이 밝았다. 40마일 전면에 조선의 가파른 해안이 시야에 들어 왔다. 이내 부산항 입구가 눈 앞에 다가 왔다. 심해에서 곧추 솟아오른 바위 섬들이 띠를 이루고 있었다.
그 사이를 통과하자 항구 초입의 왼켠에 북서-남동 방향으로 가로 놓여 있는 높은 테츠에섬(Tetsuye, 절영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임-역자)이 벽을 이루고 있었다. 섬의 절벽에 숲이 우거져 있었고 군데 군데 하얀 물줄기가 내리꽂듯이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가 보였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살펴 보니 그것은 폭포수가 아니라 깎아 지른 암벽이었다. 섬의 북단은 나지막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