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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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1948년 5월 10일 제1대 총선 당시, 준정당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총재 이승만은 종로구에 출마하지 않았다. 그의 집인 이화장은 종로구 이화동에 있었음에도 옆동네인 동대문갑구에 출마했다.
서울 중구와 더불어 종로구는 1948년 당시엔 지금보다 더한 정치적 비중이 있었다. 이승만 같은 거물이 종로구나 중구에서 낙선하면 이미지의 타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동대문갑구 출마는 그에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오랫동안 종로구는 '정치 1번지'로 불렸다. 유신체제 하의 제9대 총선을 12일 앞두고 발행된 1973년 2월 15일 치 <경향신문> 기사 '2.27 이색 대결 지대'는 "전국 제1선거구인 종로·중구는 유권자들의 의식 수준이 가장 높다는 점에서 정치 1번지"라고 설명했다.
대체로 정치 의식이 높은 곳은 노동운동이 활발한 지역이다. 그런 곳에서는 자본주의체제의 경제적 본질에 대한 지역민들의 인식 수준이 비교적 높다. 하지만 제1대 총선 이후로 우리 사회는 조선시대와 대한민국 시대의 중앙행정관청들이 위치한 곳이라는 인상 때문에 종로의 정치 의식수준을 높게 평가해 왔다.
'종로는 정치의식이 높을 것'이라는 인식과 더불어 종로의 위상을 높여준 결정적인 요소가 있다. 바로, 한양 4대문 내에 있다는 점이다.
종로구니 중구니 하는 구(區) 제도가 서울에 도입된 것은 해방 2년 전인 1943년이다. 조선총독부령 제163호가 법적 근거가 됐다. 이때 경성부는 조선왕조 시절의 한성부와 더불어 그 주변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다. 총독부는 이곳에 중구·종로구·동대문구·성동구·서대문구·용산구·영등포구를 설치했다. 이 7개 구 중에서 중구와 종로구는 4대문 내부를 관할하게 됐다. 청계천을 기준으로 조선시대 한성부의 북부는 종로구, 남부는 중구가 됐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내의 청계천 이남이 '남촌'으로 불렸다. 지금의 중구가 그런 속칭으로 불렸던 것이다. 1943년에 총독부가 이곳을 중구로 명명하게 된 것은 위 7개 구 중에서 이곳이 중앙에 있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상징성으로 본다면 종로구가 중구가 돼야 했지만, 7개 구 중에서 종로구가 가장 북쪽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게 곤란했을 법하다.
중국이란 칭호가 갖는 권위에 익숙한 동아시아 사회에서, 청계천 이남은 중구라는 명칭을 부여받았다. 총독부가 부여한 중(中)이란 글자의 힘은 종로구와 중구의 관계를 다소 모호하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조선시대 관청과 국립대학이 있었던 종로구가 상대적으로 위상이 더 높은데도, 중심과 중앙의 의미가 담긴 중구가 형식상 앞자리를 차지하게 됐기 때문이다.
1958년 제4대 총선 때 종로갑구와 종로을구가 각각 서울 제1선거구·제2선거구로 지정되기 전까지, 중구는 서울 제1선거구의 위상을 유지했다. 중구가 제1선거구가 된 것은 상당부분 중(中)이라는 언어의 힘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중구 역시 4대문 내에 있기 때문에 종로구에 필적할 만한 위상을 가지기 쉬웠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종로구에서 벌어진 이승만의 정치타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