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룡산성 성벽이곳이 김개남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의 주둔지였음을 알리는 팻말을 누군가 세워두었습니다.
서부원
삼례에서 재봉기를 선언하고 격문을 띄우자 며칠 만에 27개 집강소에서 11만 4천5백 명의 농민군이 호응하여 삼례로 집결하였다.
"이즈음 농민군은 호남지방 뿐만 아니라 충청도ㆍ경상도ㆍ경기도ㆍ강원도ㆍ황해도 등 북쪽 지방에까지 이르는 조선의 구석구석에서 일어났다. 일본군이 왕궁을 침범하고 청일전쟁을 도발한 사태는 조선의 전민중에게 심각한 위기의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으며 이에 따라 조선 전역에서 항쟁의 횃불이 타올랐던 것이다." (주석 6)
동학농민혁명군이 제2차 기포에까지 이르렀으나 여러 가지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각 포와 접주들이 거느린 군사를 모은, 지휘체계가 갖춰지지 않은 일종의 연합군적인 성격인데다 보급이나 무기ㆍ수송 등에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춰진 것이 없었다.
더 큰 문제는 동학농민혁명에 반대하는 내부세력의 도발이었다. 유생들은 초기에는 동학농민군의 위력에 눌려 침묵하거나 좌고우면하다가 정부가 청군을 불러들이면서부터 자체 민보군(民保軍)을 조직하는 등 동학농민군에 대항하고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