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개남 가묘정읍시 산외면 동곡리에 위치해 있다. 효수 당시 시신을 거두지 못하여 1995년 4월 가묘를 만들었다.
류효정
김개남이 언제 누구의 주선으로 동학에 입도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음의 글에서 추론이 가능할 것 같다.
그는 자라서 상두재를 넘어 전주로 넘나들었고, 이때 일가붙이인 전주 영장 김시풍과 교분이 두터웠다 한다. 그리고 그가 이때쯤 사귀던 사람들은 시세에 불평불만을 가진 사람, 기개가 있고 호걸스러운 사람 그리고 양반이나 벼슬아치보다 고통에 신음하는 서민들이었다 한다 (김동기의 증언).
이런 그였으니 동학에 입도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적어도 전봉준보다 먼저 동학에 들었고 도강 김씨의 자제들을 여기에 끌여들였던 것이다.
1890년대 초 최시형은 전라도 일대를 자주 순행하며 포덕에 열중했다. 1891년 최시형은 부안을 거쳐 태인 땅에 들어섰다. 그리고 지금실 김개남의 집에 찾아 갔고 이때 김개남은 여름옷 다섯 벌을 지어 올렸다 한다. (주석 9)
주석
7> 황현, 『오하기문(梧下記聞)』, 양정석, 『호남의 한』, 96~97쪽, 재인용, 징소리, 2013.
8> 김기전, 앞의 책, 54쪽.
9> 이이화, 『발굴 동학농민전쟁 - 인물열전』, 84~85쪽, 한겨레신문사, 1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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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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