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 상상화. 서울 광화문광장 동편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그가 성장하는 동안 나라 사정은 점차 어지러워갔다.
왕조 말기의 사회경제적 모순과 신분간 대립, 정치적 부패와 탐관오리의 수탈, 기존가치 질서의 붕괴와 천주교 전래와 민족종교 동학창도, 자본주의 서구열강의 침투와 이로인한 사회불안 등이 겹치면서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민란은 농민항쟁의 수준으로 이어졌다.
그 중심에 동학이 깊숙이 배어들었다. 사학자이면서 독립운동가인 박은식의 진단이다.
동학의 발단은 매우 미미했으나 그 결과는 매우 컸다.
조그마한 불씨가 들판을 불태우는 데까지 미치고 떨어진 물방울이 흘러서 강과 바다를 이루었으니, 한국의 대란과 중ㆍ일 대전이 이로 말미암아 일어났다. 철종 때 경상도 경주 사람 최복술(崔福述)이 있었는데, 그는 지체가 낮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스로 서교(西敎)에 대칭하여 동학이라 불렀으며, 그 종지(宗旨)는 유교ㆍ불교ㆍ도교를 혼합한 것이었다. 주문(呪文)은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13자였다. '붓을 잡으니 신이 강림했고 칼춤을 추니 공중에 뛰어오른다'는 따위는 매우 괴이했다.
동학의 무리들은 밤이면 반드시 깨끗한 물을 떠놓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을 기도하였고, 밥을 지을 적마다 쌀 한 숟가락씩을 떼어 놓아 성미(誠米)라고 부르면서 저축하여 교주의 봉양미로 삼았고 최복술을 받들어 신사(神師)로 삼아 서교(西敎)의 예수기독과 같이 섬겼다. (주석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