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작가가 쓴 SF소설을 읽는 시간수요일 아침마다 우리는 다른 세계로 간다
전유미
모임엔 누구도 여성만 참여할 수 있다고 한 적은 없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성들만 참여했다. 새로운 남성 참여자는 <디스 옥타비아>와 함께 찾아왔는데, 이 남성의 등장과 이 글은 아무 상관이 없으니 더는 기대마시라.
상반기에 내로라 할 만한 국내외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훑고, 하반기에는 그 가운데 마음에 든 작가의 작품을 더해 읽고 있다. 상반기에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을 함께 읽었기에 이번엔 유진목 시인이 소설인 듯 시인 듯 써내려간 <디스 옥타비아>를 읽었는데, 모두의 기대를 채우지는 못했다.
새로운 시도를 흥미롭게 본 이들도 있지만 책에 대한 평이랄까 소감이랄까, 단상은 여럿으로 갈렸고 함께 읽은 <킨>보다는 <블러드 차일드>를 비롯한 다른 작품에 영향을 받은 듯하여 버틀러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 보기로 했다. 모임원 가운데 <블러드 차일드>를 읽고 반해 모임에 오게 되었다는 분도 있어 <블러드 차일드>와 신간 <와일드 시드> 읽기로 일정을 바꾸었다.
<블러드 차일드>는 버틀러의 단편 다섯 편과 작품마다 쓰인 배경을 담은 후기, 에세이 두 편과 후기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나는 다 읽지 못하고 표제작인 <블러드 차일드>와 에세이 두 편만 읽고 참여했다.
읽은 소감을 간단하게 나누는 시간. 이상하게 여성 작가들의 SF를 읽다 보면, 여기, 지금에서 훌쩍 날아올라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는 작품도 마음에 들지만 그 작품에 이르게 된 이야기, 후기라든지 에세이 같이 더해진 글들에 더 많은 표시를 하게 된다. <블러드 차일드>도 마찬가지였다.
쓰고 싶은 마음을 자극하는 버틀러 말들
나는 말파리처럼 나를 괴롭히는 무엇인가를 상대해야 할 때, 그 대상에 대해 글을 쓴다. 나는 글을 씀으로써 문제를 정리한다.
- 56쪽, 단편 '블러드 차일드' 후기에서
나는 커다란 분홍색 공책 속에 숨었다. 두꺼운 공책이었다. 그 속에 나만의 우주를 만들었다. 그곳에서 나는 마법의 말이 될 수도, 화성인이 될 수도, 텔레파시 능력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여기만 빼고 어디에든 있을 수 있었고, 지금만 빼고 어느 시간에나 있을 수 있었으며, 이 사람들만 빼고 누구와도 있을 수 있었다.
- 266쪽, 에세이 '긍정적인 집착'에서
'나두나두' 소리가 절로 나왔다. 단편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로 알게 된 어슐러 K. 르 귄의 글을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과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이 언니도 그렇다. 나도 이 망해가는 세계로부터 뭔가 다른 곳으로 훌쩍 이동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써라. 매일 써라. 쓰고 싶은 기분이 들 때도, 들지 않을 때도 써라. 하루 중 일정 시간을 골라라. 한 시간 일찍 일어날 수도, 한 시간 늦게 잘 수도, 오락 시간을 포기할 수도, 점심시간을 포기할 수도 있다. 당신이 선택한 장르에서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일기를 써라. 어쨌든 일기는 써야 한다. 일기는 세계에 대한 관찰을 돕고, 또 나중에 풀어나갈 글감을 저장해두기에도 좋다.
- 278쪽, 신인 작가들에게 한 강연을 압축한 글이라고 밝힌 에세이
<푸로르 스크리벤디>에서
글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그저 쓰거나, 쓰지 않는다. 결국 나는 나의 가장 중요한 재능, 혹은 습관은 집요함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 282쪽. 신인 작가들에게 한 강연을 압축한 글이라고 밝힌 [푸로르 스크리벤디]의 후기 가운데
나는 '생계를 위해 SF와 판타지를 쓴다'고 말하는 버틀러가 좋다. 흑인 여성은 작가가 될 수 없다는 말에 "왜요?"하며 거절 당하고 또 거절 당하고 또또 거절 당하면서도 써내려가는 버틀러의 '긍정적인 집착'도 좋다. 나는 그의 작품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할 수 없다. 그만큼 SF를 모르고 작가를 모르고 맥락을 살피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이 책에서 무엇을 얻었는지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 작가가 이 작품을 왜 썼고, 독자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싶었든, 책은 발신의 의도와 같거나 다르게 읽는 이에게서 완성되는 거니까.
그렇게 [쓰다] 파일을 만들고 네 번째 [읽는 존재]를 썼다. SF를 읽고 글이 쓰고 싶어지는 경험은 내게만 특별한 것일까. 문득,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