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마일교단이스마일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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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알라무트 요새는 결국 몽골군의 점령으로 종언을 고한다. 대강의 전말은 아래와 같다.
칭기스칸의 손자 뭉케( Möngke Great Khan, 1206~1259)는 1251년 7월 몽골제국의 대칸에 즉위하자 자신의 두 동생 즉 쿠빌라이(Khubilai, 1215~1294)와 훌레구(Hulegu, 1217~1265) 에게 각각 동방과 서방을 할당해 주면서 정복을 명한다.
이에 따라 훌레구는 이란을 위시한 서방 원정에 나서게 된다. 곧 일칸국(오늘날의 이란)을 세우게 될 훌레구는 바그다드를 치기에 앞서 이스마일파의 본거지 알라무트 산성을 공략했다. 그때 알라무트의 이스마일 교단은 저항하는 대신 몽골에 투항하는 쪽을 택했다. 그리하여 이 난공불락의 천연요새는 1256년 11월 19일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여기에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숨어 있다. 당시 알라무트 산성에는 매우 우수한 천문대, 연구실험실, 도서관이 구비돼 있었고 이슬람의 엘리트학자들이 자유롭게 연구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중 대표적인 학자가 알 투시 (Nasir al-Din Tusi, 1201~1274)였다. 수학의 삼각법 창시자이기도 한 알 투시는 천재적인 학자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수학, 철학, 물리학, 의학, 천문지리학 등에 두루 조예가 깊었다. 그는 페르시아 후기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학자로 꼽히기도 한다(이븐 칼둔).
강리도, 그리고 알 비루니
강리도에 대한 최초의 단행본 연구서를 낸 일본의 미야 노리코(교토대)에 의하면, 훌레구는 서방 원정에 나설 때 그의 형 뭉케 대칸으로부터 알 투시를 죽이지 말고 구출해 내라는 지시을 받았다. 뭉케 대칸은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 등 여러 언어를 구사하고 유클리드 기하학의 난제를 풀 수 있을 정도로 천재적인 군주였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용명한 뭉케는 아깝게도 1259년 50세의 나이에 중국 사천성에서 돌림병에 희생되고 만다. 원래 뭉케 대칸은 알 투시를 자신의 휘하에 두려했다. 뭉케의 급서로 알 투시는 훌레구 칸에 복무하게 되었던 것이다. 알 투시로부터 천문대 건립을 건의받은 훌레구는 이를 흔쾌히 승락함과 동시에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천문대는 1259년 착공되었다. 그리하여 유라시아 최고의 천문대이자 도서관이 마라가(Maragha 혹은 Maragheh)에 건설됐고 알 투시는 그 수장이 된다.
마라가는 카스피해의 서쪽, 이란의 북서부에 위치한다. 이곳이 과연 강리도에 표기되어 있을까? 아닌 게 아니라 카스피해의 남동쪽에 '麻那哈'(중국어 ''마나허')로 표기되어 있다(위의 지도에서 맨 왼쪽 녹색 원).
마라가 천문대에는 수십만권의 서책이 소장돼 있었다. 9세기 이래로 이슬람의 학문 중심 바그다드의 지혜의 집(House of Wisdom)은 중세에서 최고의 학술 기관이자 도서관이었다. 여기에서 아르키메데스. 유클리드, 프콜레미 등의 고대 그리스 학술서 뿐 아니라 성경도 번역됐다.
<중앙아시아 역사>(History of Central Asia)에 의하면, 지헤의 집이 1258년 훌레구 점령군에 의해 파괴되기 직전에 알 투시가 훌레구의 허락 하에 무려 40만 건에 이르는 필사본을 구출해 내어 마라가 천문대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렇다면 마라가 천문대는 지혜의 집의 후속편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몽골 정복에서 살아남은 중세 이슬람의 문헌들이 당시 마라가 천문대에 집결되었다면 그 의미가 크다. 거기엔 11세기 이슬람 학문을 대표하는 알 비루니 문헌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알 투시는 알 비루니 학문의 계승자(exponent)로 알려져 있다(S. Frederick Starr 저, <Lost Enlightenment: Central Asia's Golden Age>, 2015)
그렇다면 마라가에 집대성된 첨단 천문지리학을 원나라로 전달한 학자는 누구였을까? 동시대에 원나라에서 천문지리 분야를 이끌었던 자말 앗 딘(Jamal al Din, 중국명 扎馬魯丁)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쿠빌라이의 전폭적인 신임과 지원아래 천문지리 관련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지구의를 만들어 쿠빌라이에 바쳤으며 마라가 천문대를 본 떠 이슬람 천문대를 설립했다. 또한 지리지와 세계지도를 편찬했다. 이러한 상황은 15세기 초 강리도라는 세계지도가 탄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말해 준다. 그들의 시야는 한족 중심의 중화주의의적 지리관을 탈피한, 초광역적 지리 영역이었다. 그것이 강리도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원나라 지리학과 지리정보의 원천을 찾아 계속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알 비루니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973년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난 알 비루니는 젊었을 때 주요 거점 도시간의 거리를 측량했고 그 위치를 경위도 망으로 표시했다. 그는 그런 자료를 바탕으로 북반구의 알려진 세계를 지도로 그리고자 했다.
그러나 22살 되던 995년 정변이 일어나 지도 프로젝트를 포기하고 피난 생활로 들어 간다. 그후 격동하는 정치 정세에 따라 때로는 은신하고 때로는 연금되고 때로는 보호받으며 연구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지도를 완성하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2세기 후에 그가 못다한 일을 완성한 지리학자가 나타났으니 같은 지역 출신의 나지브 바크란(Muhammad ibn Najib Bakran)이었다.
"알 비루니가 고향에서 피난을 간 일은 그의 중요한 프로젝트 즉 도시들의 정확한 위치를 포함한 지도를 만드는 것을 포기해야 했음을 뜻했다. 그로부터 다시 200년 후인 1208~1209년 코라산 거주의 지리학자 나지브 바크란이 축척이 정확한 격자망의 이슬람 세계지도를 만들어 냈다. 그는 지도제작시 알 비루니가 남긴 주요도시에 대한 경위도 목록을 활용했다. 바크란은 <세계의 책>Book of the World에서 자신의 지도가 지닌 특징을 서술했다. "많은 적색 선분들이 동에서 서로 북에서 남으로 가로 지른다. 이것들은 경도선과 위도선들이다. 이 지도의 큰 이점은 경위도선을 통해 각 도시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 Christoph Baumer, <The History of Central Asia>(2016)
자말 앗 딘이 1267년 원나라에서 만든 지구의는 바로 바크란의 세계지도(실물은 전해 오지 않는다)에서 유래된 것이며, 14세기 초 원나라의 눈금망 지도들 또한 여기에서 유래됐다(Christoph Baumer, 위의 책).
강리도에 수용된 지리지식
우리는 이렇게 알 비루니가 원나라 천문 지리 사업에 미친 영향을 추적해 보았다. 이에 의거하여 아래와 같이 강리도의 새로운 계보를 구성해 볼 수 있겠다.
2세기 프톨레미(고대 그리스 문명권)→10~11세기 알 비루니(이슬람 문명권)→13세기 초 나지브 바크란(이슬람 문명권)→13세기 후반 자말 앗 딘(이슬람 문명권)→14세기 전반 이택민/청준(원나라의 한족)→15세기 초 조선의 사대부(김사형, 이무, 이회, 권근 등: 유교문화권)
이로써 우리는 여러 문명권의 지리학과 지리지식이 강리도에 선택적으로 수용되고 변용됐음을 알게 된다.
이 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알 비루니의 고향 즉 Kat(혹은 Kath)에 관한 것이다. 강리도에 可剔(중국어 '가티')라 표기돼 있다(첫 지도에서 붉은 원). Kat는 강리도에서처럼 실제로 남부 카스피해의 동쪽에 위치한다. 알 비루니 시기에는 소왕국의 수도였다. 지금은 알 비루니를 기려 그 지명이 Bernuiy로 바뀌었다. 위도는 41.7도로서 우리나라의 평양(39.2도)과 비슷하다. 다시 말해 알 비루니의 고향 카트와 평양을 이으면 얼추 수평선이 된다. 그런데 강리도에서도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