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숙과 세아들김성숙과 세아들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독일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할 때 스스로 레지스탕스운동에 참여한 마르크 블로크(1886~1994)는 자식 6명을 둔 56살의 소르본 대학의 교수였다. 그는 뤼시앵 페브라와 함께 아날학파를 일으켜 사회경제사가로 독보적 지위를 얻은 학자로서, 이미 제1차 세계대전에 프랑스 장교로 종군하였기 때문에 다시 입대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블로크는 조국이 독일에 점령당하자 자신의 나이나 가족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나 이루기 어려운 학문적 기득권을 내려놓고, 독일군과 싸우는 최전선의 레지스탕스 부대에 들어가 나치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싸우는 과정에서 예상외로 프랑스인들이 나치에 협력하고 있음을 지켜보았고, 블로크는 주력부대를 따라 영국으로 망명하기도 하였다. 블로크는 이들에게 쫓기면서 역사학자로서 프랑스정부 지도자들의 행적을 돌이켰다.
그리고 틈틈히 『이상한 패배』라는 제목으로 메모를 하였다. 그는 프랑스가 해방되기 1년 전인 1944년 6월 16일 프랑스 리옹의 벌판에서 나치 게슈타포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상한 패배』는 해방 뒤에 간행되었다.
1940년 6월 14일 독일군이 파리에 진주하던 날 블로크는 프랑스의 서부지방 노르망디 사령부에서 다른 장병들과 함께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 조국의 슬픈 운명의 원인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블로크는 어느 장교가 "역사가 우리를 배반했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 후 4년간 블로크의 생활은 그 장교의 생각을 철저히 부정하는 생활이었다. 블로크는 연합군과 함께 일단 영국으로 후퇴하지만 거기 머물러 있지 않고 나치스 치하의 프랑스로 돌아와 향리 리옹에서 반 나치스 지하 단체의 책임자로서 레지스탕스운동에 가담했다.
이 시기에 그는 두 권의 책을 썼는데, 하나는 『이상한 패배』이고, 또 하나는 『역사를 위한 변명』이다. 『이상한 패배』에서 그가 주장하는 것은, 프랑스의 패인은 역사가 프랑스를 배반했기 때문이 아니라 프랑스의 지도층이 역사를 배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역사는 결코 우리를 배반하지 않는다. 이것이 블로크의 굳은 신념이었다. (주석 9)
느닷없이 마르크 블로크를 찾은 것은 해방된 조국에서 핍박받는 김성숙과 그의 동지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조국이 자신들을 배반한 '이상한 패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데 이르러서이다.
'이상한 패배'였다. 그리고 '이상한 패배'는 계속되었다.
이 즈음 시조시인 노산 이은상이 김성숙을 위로하기 위하여 시 한 편을 지어 바쳤다.
비바람 한평생을 얻은 것 무엇이오.
고난에 지치다 못해 머리에 서리를 이고
이 저녁
지하문 밖에 한 잘 술이로구려.
세검정 물소리에 시를 흘려 보내시오.
외롭다 말으시고 웃고 받아 마시구려
동지들
드리는 잔이라 맛이 별로 다르리다
무엇이 그리워서 생이야 탐하리만
제 땅엣 푸성귀라 그게 아니 좋으리까. (주석 10)
주석
8> 목우(木偶), 「진보적 민족주의자의 비극적 일생」, 『민족불교』창간호, 77쪽, 1989.
9> 노명식, 「역사에의 성실 ㅡ 자유와 평등」, 『문학과 지성』, 1980년 봄호, 16쪽.
10>앞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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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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