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1백여 일이 1945년 11월 23일, 대륙을 유랑하던 임정 요인 제1진 15명이 환국한다. 그러나 하지 중장의 성명이 있기 전까지 이들의 환국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대한민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1백여 일이 1945년 11월 23일, 대륙을 유랑하던 임정 요인 제1진 15명이 환국한다. 그러나 하지 중장의 성명이 있기 전까지 이들의 환국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권기봉
미국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홀대하였다.
홀대를 넘어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10월 16일 미국 태평양방면 육군 총사령관 맥아더가 주선한 비행기를 타고 도쿄를 경유해 서울에 도착했다.
미 육군 남조선 주둔군사령관으로 임명된 존 하지 중장이 이승만이 일본 도쿄에 도착했을 때 그를 만나러 일본까지 가서 맥아더와 3인 회담을 가진 데 이어 대대적인 귀국환영대회를 연 것과는 크게 대조되었다.
1일 상해를 떠난 주한미군 수송기는 저녁 무렵에야 옥구비행장에 도착했다. 김성숙의 마음은 벅차 올랐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땅에 엎드렸다. 흙을 한 움큼 손에 쥐고 코에 대어 보고 흙냄새를 맡았다. 다른 원로 독립운동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들의 환국은 문자 그대로 '쓸쓸한 귀향'이었다.
짤막한 귀국선언도 미리 발표되지 못하였고, 이들의 입국을 알 턱이 없는 거리엔 당연히 환영인파도 없었다. 임정요인들의 호송을 맡은 미군들의 태도도 거칠었다. 점심을 거른 그들에게 저녁식사도 대접하지 않은 채 헤드라이트를 켠 군용 지프차에 실어 밤길의 서울행을 재촉할 뿐이었다. 임정요인들을 급히 서울로 호송하라는 하지 장군의 명령이 있었다는 이유였다.
대부분이 노인들인 일행은 종일 비행기에 시달리고 지프차의 진동을 받게 되니 거의 혼절할 형편이었다. 논산에 이르러서야 겨우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이튿날엔 다소 편한 일정이었다. 유성비행장에서 비행기로 서울에 왔기 때문이다. 이들 일행은 곧바로 제1진의 김구 일행이 머무는 경교장에 들렀다가 혼마치 호텔에서 고국에서의 둘째 밤을 맞았다. (주석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