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용대에 새로 편입된 여군(1939년)조선의용대에 새로 편입된 여군(1939년)
눈빛
해방 후 남한으로 환국한 조선의용대 출신은 몇 사람이 안 되었다.
의열단에도 참여하고 황민(黃民)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의용대 제1구대 대원으로 활동했던 김승곤은 조선의용대의 창설에 대한 의미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이때 한국 청년들의 전쟁참여에 대하여 중국당국과 협의한 결과, 의용대를 결성해서 참전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1938년 10월 10일 임시수도 한구(漢口)에서 역사적인 조선의용대가 창립되었으며, 이를 세계만방에 선언하였다.
비록 200여 명의 소수이고 의용대라 하였지만, 실제로는 독립군으로서 나라가 망한 후 국제 정규전에서 독립군이 직접 참전한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므로 당시 국제적으로 의의가 컸던 것이다. 이 사실이 미국 각 신문에 보도되자 재미 교포들은 자진해서 의용대후원회를 조직하여 적극 지원하기로 하였다. 이때 전시는 매우 위급하였다. (주석 7)
조선의용대 대원으로 중국 타이항산 전투에서 부상당하고 일본으로 끌려갔던 김학철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을 남겼다.
조선의용대 발대식에 참가한 사람의 수가 모두 합하면 200명 가량 됐으나 실제로 군복을 입고 대기(隊旗) 밑에 정렬을 한 사람은 150명 밖에 안됐었다. 이 150명이 또 2개 지대로 나뉘는데 제3지대는 멀리 중경에서 따로 발족을 했으므로 여기에는 참가를 하지 않았다.
이 발대식에 참가한 유일한 여성 - 흥일점은 당년 23세의 김위(金煒, 본명 金幼鴻)으로서 '영화 황제'라고 불리던 스타 김염(金焰)의 큰누이 동생이었다.
조선의용대의 총대장은 김원봉, 제1지대장은 박효삼(朴孝三), 제2지대장은 이익성, 그리고 왕통(王通)과 김학무가 각각 1, 2지대의 정치위원으로 임명됐다.
식순의 하나로 전체 대원들의 가슴에 배지(휘장) 하나씩을 달아주는데 거기에는 '조선의용대'라는 한문 글자 다섯 자와 'Korean Volunteer'라는 영문자 한 줄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제1지대에 소속돼 제9전구 (호남성)로 떠나게 됐다. 제2지대는 제5전구 (호북성)로 떠나는데 그 중 일부는 제1전구 (하남성)까지 진출을 했다. 당시 제9전구의 사령관은 진성, 나중에는 설악(薛岳), 제5전구의 사령장관은 이종인(李宗仁), 그리고 제1전구는 위립황(衛立煌)이 사령장관이었다.
시민들의 사기를 진작하기 위해 각 사회단체들이 한구청년회관에서 연극 공연들을 하는데 우리도 축에 빠질 수 없어서 부랴사랴 연극 하나를 준비하게 됐다. 벼락장(醬) 담그듯이 해낼 작정인 것이다.
한데 총칼 밖에 모르는 집단인지라 문화 예술 인재가 얼마나 결핍했던지 그 각본을 쓰라는 명령이 떨어지기를 뉘게 떨어졌는가 하면 바로 나 이 김학철에게 떨어졌다. (주석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