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동원 노동자들
출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2018년 대법원 판결은, 앞서 살펴 본 것처럼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을 특정한 다음, 원고들의 청구권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청구권"이므로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다고 볼 수 없다"라고 판단했다.
즉, 원고들의 청구권은 불법적인 식민지배와 직결된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이므로 강제동원이며, 그러한 강제동원 문제는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왜 '불법적인 식민지배'일까? '불법적인 식민지배와 직결된 강제동원'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불법적인 식민지배
2018년 대법원 판결 자체에는 일제의 한반도 지배가 왜 '불법적인 식민지배'인지에 대한 근거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그 근거는 원심판결인 서울고등법원 판결에 제시되어 있고, 서울고법은 그 부분에 대해 2012년 대법원 판결을 따르고 있으므로, 결국 2018년 대법원 판결은 2012년 대법원 판결의 근거를 그대로 채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012년 대법원 판결의 해당 부분은 아래와 같다.
대한민국 제헌헌법은 그 전문(前文)에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상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라고 하고, 부칙 제100조에서는 "현행법령은 이 헌법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한 효력을 가진다"고 하며, 부칙 제101조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또한, 현행헌법도 그 전문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대한민국 헌법의 규정에 비추어 볼 때, 일제강점기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규범적인 관점에서 불법적인 강점(强占)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대한민국은 3.1운동의 독립정신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는데, 그 양자는 일제의 지배를 부정한 것이므로 "일제강점기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규범적인 관점에서 불법적인 강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은 1919년의 일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 다시 말해 1910년부터 1919년까지는 왜 '불법강점'인가? 그 근거는 2012년 판결에도 나오지 않는다. 물론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서 그 근거를 도출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일제의 지배를 부정한다는 것은 그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조금 더 파고 들면, 1910년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사이에 체결된 일체의 조약은 애당초 무효라고 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입장이 보다 직접적인 근거가 될 것이다. 대법원 판결은 그 공식입장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일제 법령의 효력
2012년 대법원 판결의 위의 판단은 일본의 재판소가 선고한 판결을 승인할 것인지 여부를 다루는 부분에서 등장한다. 원고들 중 일부는 일본의 재판소에 제소해서 패소 판결을 선고 받았었다. 피고 일본 기업은 그 판결을 한국 법원이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대법원은 일본 판결을 승인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위반하는 것"이므로 승인할 수 없다고 판단하면서, 일본 판결의 문제가 되는 부분을 아래와 같이 적시했다.
이 사건 일본 판결이 일본의 한반도와 한국인에 대한 식민지배가 합법적이라는 규범적 인식을 전제로 하여 일제의 '국가총동원법'과 '국민징용령'을 한반도와 원고 등에게 적용하는 것이 유효하다고 평가(한 부분)
요컨대,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불법강점이었는데 일본 판결은 합법지배를 전제로 하고 있으니 승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대법원 판결은 일본 판결이 "일제의 '국가총동원법'과 '국민징용령'을 한반도와 원고 등에게 적용하는 것이 유효하다고 평가"한 것도 잘못이라고 짚고 있다. 역시 '합법지배'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래서 2012년 대법원 판결은 위의 첫 번째 인용문 뒤에 아래와 같이 덧붙인다.
일본의 불법적인 지배로 인한 법률관계 중 대한민국의 헌법정신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은 그 효력이 배제된다.
그렇다면 대법원은 어째서 일제 법령의 효력을 배제시킬 수 있는가?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이 위의 첫 번째 인용문에 등장하는 1948년 헌법 부칙 제100조, 즉 "현행법령은 이 헌법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한 효력을 가진다"라는 조문이다. 여기에서의 '현행 법령'은 정부 수립 당시에 남아 있던 미군정의 법령과 미군정에 의해 효력이 인정된 일제의 법령이다.
제100조의 의미는 그 법령들이 대한민국 헌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에서 효력을 가진다라는 것이다. 반대 해석하면 대한민국 헌법에 저촉되면 효력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된다. 그에 대한 판단은 개별사건의 경우 최종적으로는 최고법원인 대법원이 하게 된다.
일제의 법령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상당 부분이 상당 기간 동안 효력을 가졌다. 정부 수립 후 단기간에 모든 법령을 새로 갖출 수가 없었기 때문에 '법의 공백'을 피하기 위해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대한민국 헌법에 저촉되는 것까지 효력을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1948년 헌법 제100조가 규정되게 된 것이다.
'징용'과 '강제동원'은 다르다
대법원 판결은 일제의 「국가총동원법」과 「국민징용령」이 '불법적인 식민지배와 직결된'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대한민국 헌법에 저촉되기 때문에 효력이 배제된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일제의 「국가총동원법」과 「국민징용령」이 바로 '징용'의 근거법령이다. 그 법령들의 효력이 배제된다면 어떻게 되는가?
'징용'은 「국가총동원법」과 「국민징용령」 등 일제의 법령에 근거한 제도였다. 다시 말해 일제는 '징용'이라는 '합법적인' 제도를 만들어 한반도의 인민을 데려가서 일을 시킨 것이다. 그러니 일본의 입장에서는 '징용'에 대해서는 법령에 따라 져야 할 책임 이외에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이 된다.
하지만 「국가총동원법」과 「국민징용령」의 효력이 배제된다면, 일제는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한반도의 인민을 강제로 연행해서 강제로 노동을 시킨 것, 즉 강제동원을 한 것이 된다. 대법원 판결은 그러한 이유에서 "일제강점기의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 경우에는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이 발생하게 된다. 대법원 판결이 해결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강제동원' 문제인 것이다.
'징용'은 해결되었나?
여기에서 기억을 되살리자. 「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된 "한국의 대일청구요강"에 "피징용 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면 여기에서 말하는 '징용에 관련된 미수금과 보상금'은 무엇일까?
일제의 1944년 「국민징용령」(칙령 제89호)에서는 피징용자에게 당연히 임금을 주게 되어 있었고, 징용기간 중의 업무상 상해 또는 질병이나 그로 인한 사망에 대해 부조를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한국인 피해자들은 그 임금과 부조를 받지 못했다. 바로 이것이 '징용에 관련된 미수금과 보상금'이다. 그리고 이 부분은 「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된 것이다.
다만 '징용'은 해결되었다고 할 때, '해결되었다'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추가적으로 따져보아야 한다. 2018년 대법원 판결에는 이에 관한 판단은 없다. 왜냐하면 원고들이 징용에 관한 미수금이나 보상금은 청구하지 않고 강제동원에 관한 배상금만을 청구해서 애당초 판단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해결되었다'라는 것의 의미는 2012년 대법원 판결의 가정적 판단에서 나온다. 해당 부분은 아래와 같다.
(어떤 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다고 하더라도 그 개인청구권 자체는 청구권협정만으로 당연히 소멸한다고 볼 수는 없고, 다만 청구권협정으로 그 청구권에 관한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이 포기(된 것에 불과하다.)
즉, '징용'이 「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징용'에 관한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이 포기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며, '징용' 피해자 개인의 청구권은 소멸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일본 정부와 최고재판소의 입장이기도 하다. 일본 정부와 최고재판소도 협정 자체에 의해 청구권이 소멸한 것은 아니라고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