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기장 밖’이란 표현.
@HON5437
'모기장 밖'은 모기장 밖에서 사람들을 들여다보는 모기를 가리킨다. 주류에서 소외된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이 같은 아베의 처지가 너무나 딱해서 화면 속에서나마 남북미 정상들과 함께 있게 해주고 싶어 합성 사진을 만들게 됐노라고 위 이용자는 말했다.
지금의 북미관계는 동아시아 차원을 넘어 세계를 움직이는 핫이슈다. 세계 최강 미국에 대한 북한의 도전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고, 최첨단 무기인 핵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만약 미국이 이 문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경우에 따라 미국의 패권이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상황 여하에 따라서는 세계질서를 심하게 요동치게 만들 수도 있는 사안인 것이다.
한국은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중국·러시아는 그보다 낮은 수준으로 이 관계에 개입하고 있다. 그에 비해 일본은 북한을 지척에 두고 이 관계에 끼어들지 못하고 있다. '모기장 밖 일본 외교'라는 탄식이 나올 만도 하다.
물론 일본 정부가 아무런 개입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과의 교섭을 통해, 또는 한미일 3자 교섭을 통해 간접적이나마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김정은과의 직접 회담을 성사시키지 못하고 있으니, 한국과 중국·러시아에 비해 소외돼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일본이 '모기장' 밖에 있을 수밖에 없는 원인은 북일이 미수교인 데다가 상호불신 상태에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은 특수관계라는 이유로, 미국은 직접 만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적대관계라는 이유로, 중국·러시아는 북한의 동맹국이거나 과거에 그랬다는 이유로 북한 최고지도자와의 만남을 성사시키고 있다. 일본은 다소 어정쩡한 적대관계인 데다가 국교도 없고 상호 신뢰도 없기 '재팬 패싱'(Japan Passing)이라는 곤경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북일 양국은 1950년대부터 상호 교류의 가능성을 물색해 왔다. 주로 경제적 이유에서였다. 경제적 필요성은 북한뿐 아니라 일본에도 있었다. 북한 시장으로 영역을 확대하려는 일본 기업들의 의지가 일본 정부의 대북관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양국의 수교는 번번이 무산됐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 모두가 동일한 경험을 갖고 있다. 김일성 주석 때인 1991년 1월 30일, 북일수교를 위한 정부간 교섭이 개시됐다. 세계적인 탈냉전 분위기에 편승해서 이뤄진 회담이었다. 이 회담은 1992년 11월까지 평양과 베이징에서 총 여덟 차례 개최됐다. 하지만, 성과를 도출하지는 못했다. 1993년 제1차 북미 핵위기가 터진 게 결정적 이유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때인 2000년에도 교섭이 재개됐다.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기 전인 그해 4월 북일 회담이 재개됐다. 이렇게 시작된 북일 회담은 김일성 때와 달리 평양·베이징뿐 아니라 도쿄에서도 개최됐다. 그만큼 분위기가 훈훈해졌던 것. 이 흐름이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평양 방문과 평양선언 도출로 이어졌다.
하지만, 결과는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이때는 납치자 문제가 최대 쟁점이 됐다. 북한은 '사회주의가 좋아서 자발적으로 입북했다'고 주장하고, 일본은 '북한 공작원들의 꼬임에 넘어가 납북됐다'고 주장하며 논쟁이 벌어졌다.
논쟁은 일본의 승리로 일단락됐다. 2002년 9월 17일 김정일은 납치 사실을 인정하고 관련 조치를 약속했다. 납치를 부인했던 북한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은, 통 큰 결단으로 일본 여론을 호의적으로 바꿔 놓으면 북일 수교에 속도가 붙을 거라는 김정일의 판단 때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상황은 김정일의 의중과 정반대로 흘러갔다. 북한이 납치 사실을 인정하자 일본 여론은 적대적으로 돌변했다. 북한의 반인권 행위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수교보다 납치문제가 급선무라는 여론이 비등해졌다. 우익 단체들이 도쿄 시내에서 선전용 차량을 끌고 다니며 납치문제를 이슈화시키는 한편, 조총련 한국인들에게 괴롭힘을 가하면서 북일관계는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북한과 일본 사이에 흐르는 강, '납치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