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당 노회찬 원내대표가 4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비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고 있다.
남소연
노회찬의 가족은 피난민들이 많이 모여 사는 부산 초량의 산동네 남의 집 셋방에서 힘겹게 살았다. 6ㆍ25 전후의 시기라서 어렵지 않은 사람이 없었지만, 북한에서 빈손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가 태어난 1956년은 해방 11년째로 이승만 대통령이 3선을 앞두고 정치곡예를 부리던 시점이다. 장기집권을 위해 3선 개헌까지 감행하고는 불출마를 선언하고, 측근과 자유당이 갖은 공작을 벌였다. 심지어 우의ㆍ마의까지 동원하여 '이승만 각하'의 출마를 요청했다. 결국 유력한 야당의 후보 신익희의 사망으로 손쉽게 이승만은 3선을 거머쥐게 되었다.
이승만의 총애를 업고 군부는 물론 정치에 개입하여 국정을 농단했던 육군특무대장 김창룡이 허태영 대령 등에게 암살되고, 백주의 민주당 전당대회장에서 장면 부통령이 저격당하는 등 정치테러가 그치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의 무능과 부패는 극에 이르렀다. 미국이 지원한 막대한 잉여농산물은 특권층의 배를 채울 뿐, 절양농가는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보릿고개를 넘느라 허기진 국민 중에는 아사자가 속출했다. 집에서 밥을 먹지 못한 결식 아동이 수만 명에 이르렀다.
뒷날 노회찬이 존경하고 그의 진보정책을 높이 평가하면서 수용하고자 했던 죽산 조봉암은 그가 두 살 때인 1958년 1월 이승만 정권이 진보당 간부 7명과 간첩 혐의를 씌워 구속하고, 이듬해 7월 31일 조봉암의 사형을 집행하였다. 검찰과 사법부가 이승만 정권의 하수인이 되어 자행한 사법살인이었다. 정치권력의 사법농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노회찬의 성장기 한국 사회는 전후의 폐허 상태에서 이승만 정권의 패악으로 나라의 사정이 말이 아니었다. 경찰이 폭력배들을 앞세워 치안을 유지하는 야만의 시대, '경찰 파시즘'의 시대였다. 사회정의가 실종되고 권력과 폭력이 난무했다. 어디에서도 희망의 길이 보이지 않았다.
동양에서는 옛적부터 천인상관론(天人相關論)이 제기되었다. 한대의 학자 동중서(董仲舒)에 의해서였다. 나라에 도를 벗어난 실정이 있으면 하늘은 먼저 재해를 내려 견고(譴告)하고, 그래도 반성하지 않으면 다시 괴이(怪異)를 내려 두렵게 한다. 그런데도 개선하지 않으면 마침내 파멸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과학적인 근거와는 상관없이 동양인들의 심중에는 천인상관론의 사상이 자리잡았다. 이승만 정권은 갖은 패악을 저지르며 1960년 3ㆍ15 부정선거를 감행하다가 1960년 4ㆍ19 민주혁명으로 타도되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학생ㆍ시민들이 희생당하였다.
노회찬은 유년 시절에 이같은 정치적 패악과 사회적 질곡을 들으며 겪으며 성장한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조봉암의 사법살인은 진보정책으로, 4월 혁명은 반독재 민주투쟁의 정신적 자양으로 자리잡게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