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노태우의 쿠데타. 사진은 12·12 쿠데타를 다룬 <뉴스위크> 표지. 서울 광화문광장 동편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박정희 체제 하에서 선배들을 견제하는 데 이용됐던 육사 11기 이하는 박정희 사후에 본격적으로 선배들을 들이받는다. 제1차 쿠데타인 12.12 쿠데타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구속하고 군부를 장악한 데 이어, 행정부까지 장악할 목적으로 제2차 쿠데타인 5.17 쿠데타를 단행한다.
이들이 5.17을 감행한 근본 목적은 10.26 이후 폭발적으로 분출한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진압하는 것이었지만, 그것과 별개 차원으로 구군부 세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런 관점은 5.16 당사자이기도 한 김종필의 인식에서 특히 잘 발견된다.
김종필이 이끄는 공화당은 12.12를 계기로 강화되는 신군부를 견제하고자 1980년 5월 16일 비상대책회의를 열었다. 신군부에 대한 구군부의 두려움을 반영하는 일이었다. <김종필 증언록> 제2권에 이런 대목이 있다.
"공화당은 긴박감이 감돌던 그 전날 16일 긴급 당무회의를 열었다. 3시간 40분에 걸친 난상토론 끝에 최 대통령에게 전달할 위기관리와 수습 대책을 결정했다. 정치 일정을 대폭 단축하고 계엄을 해제하는 내용이었다."
전두환의 비상 권력은 10.26 당시의 계엄령에 기초했다. 이 계엄령을 해제하면 전두환의 정치적 입지가 소멸될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이 5월 17일을 디데이로 잡은 데는 계엄해제 건의안에 대한 두려움도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 김종필의 해석이다. 계엄령 해제를 막고자 신속히 계엄령 전국확대라는 5.17 조치를 내놓았다는 것이다.
5월 16일의 공화당 당무회의는 밤늦게까지 계속됐다. 다음날인 5월 17일 김종필은 남산 공화당 당사에 출근해 전날 결정된 시국 수습안을 정리하며 상황 타개를 고민했다. 그런데 그날 낮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구름 한 점 없던 이 날, 그는 낮 1시에 최규하 대통령으로부터 뜻밖의 '퇴짜'를 맞았다. 청와대가 그의 면담 신청을 거절한 것이다.
김종필은 "뒤숭숭한 분위기여서 바깥에서 식사를 할 기분이 들지 않았다"고 그때의 느낌을 전한다. 기분이 찜찜했던 그는 일찌감치 청구동 자택으로 귀가했다. 결국 그날 밤에 일이 터지고 말았다. 밤 11시 20분, 신군부의 제2차 쿠데타를 두 눈으로 직접 목도하게 된다. <김종필 증언록> 제2권은 이렇게 말한다.
"밤 11시 20분, 미니버스 2대에 나눠 타고 온 군인들이 M16 소총으로 무장한 채 청구동 집에 들이닥쳤다. 군인들이 집 주위를 에워싸고 보안사 수사관 장모 준위가 먼저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최인관 비서에게 '세상이 어지러워서 김 총재를 조용한 곳으로 모셔야겠습니다. 총재님께 보고 사항이 있으니 뵙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내가 있는 서재 2층으로 최인관 비서의 뒤를 따라서 장 준위가 올라왔다. 그는 내게 목례를 하더니 '죄송합니다. 상부의 지시에 따라 총재님을 모시고 가야겠습니다'고 말했다."
12.12 때 육사 5기 정승화를 연행했듯이, 5.17 때는 육사 8기 김종필을 연행해 간 것이다. 5.16을 주도한 5기와 8기가 육사 11기에 의해 무너지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이렇게 전두환은 군대를 동원한 연행 형식을 빌려 제2차 쿠데타를 단행했다. 계엄령을 해제해 전두환의 기반을 축소시키려는 구군부의 움직임에 대해 그런 식으로 선제공격을 가한 것이다.
이런 두 차례 쿠데타로 5.17은 5.16을 꺾었다. 5.17은 일차적으로는 민중의 민주화 열기에 맞선 것이지만, 이렇게 2차적으로는 구군부에 맞선 신군부의 도전이기도 하다. 10.26 이후 한걸음 앞으로 나아갔어야 할 역사가 뒤로 퇴행하는 순간이었다.
잊지 말아야 할 5.18 민주화운동의 함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