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 한 빌딩에서 직원들이 야간 회의를 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스트레스를 밖으로 풀어내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점점 마음의 상태가 몸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한의원에 끌려갔다가 의사에게 한소리를 들었다.
"이러고 어떻게 살아요? 맥이 하나도 안 잡히네."
진단 결과 우울증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스트레스로 인한 돌발성 난청이 왔는데도 그 사실조차 모른 채 연일 야근하다 결국 한쪽 청력을 잃었다. 그런데도 내 청춘을 불사르며 열심히 일한 곳을 박차고 나오자고 결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내 나이가 서른 중반, 한창 일하며 커리어를 쌓을 나이였으니 브레이크를 잡기가 더 어려웠다.
그렇게 달리다가 순간 멈칫하게 된 계기는 내 몸이 아닌 일 때문이었다. 사장이 창업 일등 공신인 메인 팀의 부장을 자르려 했다. '답보 상태인 판매 실적 돌파구 마련을 위한 분위기 쇄신용 인사'가 명분이었다. 회사를 향한 신뢰가 와장창 깨져버렸다. 묵묵하게 일하며 회사를 함께 일으킨 사람을 자를 정도면, 나 하나쯤은 언제든 자를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 부장님을 좋아했지만, 그 모습이 나의 미래가 되는 건 싫었다.
누군가처럼 되기 싫어서, 혹은 누군가처럼 되고 싶어서, 내가 원치 않는 미래가 나에게 이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 혹은 내가 원하는 미래에 이르기 위해 과도하게 애쓰면서 살았다. 집과 회사만을 오가며 야근과 주말 근무까지 감수했다.
그야말로 '슈퍼우먼'처럼 살았다. 아이를 키우면서 일하는 친구들은 더욱 더 슈퍼우먼이 돼야만 했고, 비혼으로 나이 들어 프리랜서가 된 나는 내 한 몸 책임지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슈퍼우먼이 됐다.
빨리 어딘가에 다다르고 무언가를 마련해 놔야 할 것만 같은 조급함과 욕망이 늘 혼재돼 나를 밀어붙이곤 했다. 경주하듯 앞만 보고 내달리는 동안, 나의 얼굴은 어느새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 속 대사처럼 변해 있었다. "성실한 무기징역수"처럼.
모든 삶은 작고 크다
'아등바등 살았는데 겨우 여기인가, 고작 이것뿐인가' 하는 허무에서 조금 자유로워진 건 2년 전 참석한 동창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였다. 아주 오랜만에 '가장 출세한 친구' A가 얼굴을 내비쳤다. 반가워서 서로 안부를 나누는 와중에 A는 자녀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꽤 심각한 문제였다.
다들 걱정하며 위로해 줬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다른 친구들이라고 해서 사정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는 싱글맘으로 회사의 심한 갑질을 감내하며 고군분투하는 중이었고, 누군가는 가장으로서 두 자녀를 키우고 있었고, 누군가는 꽤 큰 병을 이겨내고 이제야 조금 편안해졌나 싶었는데 친정엄마가 치매에 걸려 마음고생 중이었다. 각자 서 있는 자리는 다르지만, 감당해야 하는 무게는 비슷했다. 누가 더 낫다는 건 없었다.
그제야 보이는 게 있었다. 같은 지점에서 출발해서 와다다 달려나갔던 사람들, 그래서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 건가?' 하면서 나를 불안케 하고 의심케 했던 주자들, 혹은 뒤처졌던 주자들. 이들 모두 비슷한 지점에서 달리고 있으며 비슷한 고민을 나눈다는 사실이다. 결혼과 양육으로 멀어진 친구들도 어느 사이에 다시 옆에 와 있다. 돌고 돌아서 비슷한 지점에 서게 된 것이다. 그들은 이제 만나면 가정이나 시가, 아이들 사연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다.
40, 50대 중년 남성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눠도 비슷한 말을 한다. 엄청 출세해 부러움의 대상이던 사람도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거나, 이혼해서 혼자 살거나, 일찍 퇴직해서 할 일을 찾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반면, 그저 그랬던 친구가 무난하게 잘 살고 있기도 한다는 게 그들의 증언이다. 결혼을 했건 안 했건, 잘 나갔던 사람이건 아니건 퇴직 후의 삶을 보장받지 못한 불안과 막막함은 비슷하다. 결국은 오십보백보다.
어차피 비슷한 지점에서 만나게 될 텐데 왜 그렇게 아등바등했을까. 어리석게도 그때는 몰랐다. 애쓰며 살아도 원치 않는 상황이 오거나, 원하던 미래의 모습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열심히 살면 그만큼의 보상도 따를 거라 믿었다. 안전한 미래도 보장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몇 번의 피눈물을 흘리며 배운 건, 삶은 늘 우리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치고 도망간다는 사실이다.
열심히 사는 삶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나는 여전히 열심히 사는 게 좋다. 단지 과도한 열심으로 눈앞의 것에 급급하며 살았던 과거를 후회할 뿐이다. 근시안이 되어 나를 돌보지 못했고 주변에도 무심했다. 나를 포함한 평범한 약자들이 겪는 부당한 노동 환경이나 불평등한 구조에 저항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내가 사는 사회에 무감각했다. 내 삶은 갈수록 지루하고 경직됐다.
"아이의 한창 예쁜 시기는 다시 되돌릴 수 없어." 자녀가 있는 사람들이 종종 하는 말이다. 정신없이 사는 동안 어느새 아이가 다 자라버렸다는 아쉬움이자 허무함이리라.
나의 빛나는 30대도, 내 부모의 조금 더 젊은 날도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는 걸 그땐 잘 몰랐다. 아등바등 애쓰며 사는 동안 나는 어느덧 시들었고 부모는 너무 늙어버렸다. 그렇다고 제대로 뭔가 이루거나 돈을 많이 벌어놓은 것도 아니다. 그저 열심히 일한 것만을 훈장 삼는 기성세대가 돼 있었다. 너무 아름다운 시간이 증발해 버린 것 같아 아쉽고 허무하다.
약간의 틈을 만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