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니카(1937)
소피아 왕비 미술관
죽은 아이를 안고 우는 여자, 창에 찔려 비명을 지르는 말, 누워있는 시체, 무릎을 꿇은 채 절규하는 사람, 고통에 몸부림치는 생명들. 이들의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흑백이라 음울한 분위가 더욱 진한 이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최고의 걸작이라 불리는 '게르니카'다. 그림 위의 전등은 태양을, 바닥의 부러진 칼은 민중의 패배를 상징하는 이 그림은 스페인 내전 당시 게르니카 지역에 실제로 벌어진 일을 주제로 다뤘다.
이건 당신들이 그린 그림이야
1937년 4월 26일, 공화당의 반대파인 프랑코 정권의 요청을 받은 나치는 24대의 폭격기를 동원해 스페인의 소도시 게르니카를 무참히 폭격했다. 이 폭격으로 2000명이 넘는 지역주민이 죽거나 다쳤다. 남자 대다수는 전선에 투입된 상태라 마을에는 아이들과 여자들이 있었다.
게르니카 주변의 다리와 도로를 파괴해 병력이동과 군수품 보급에 지장을 주려는 게 당초 계획이었지만 나치는 방향을 틀어 마을을 공격했다. 무차별 공격으로 공화주의자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면서 동시에 독일의 무기를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바스크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자 문화 전통의 중심지인 게르니카가 어제 오후 반란군의 공중폭격으로 완전히 초토화됐다. 폭격은 방어 능력이 없었으며 전선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이 도시에 45분간 계속됐다. (중략) 그런가 하면 전투기들은 밭으로 달아나는 주민들에게도 무차별 기관총을 쏘아댔다. 이리하여 게르니카는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 <런던타임스> 보도 내용
스페인 출신의 피카소는 이 사실에 격노했다. 파리 만국박람회 스페인관에 전시할 그림을 의뢰받았던 피카소는 이 뉴스를 듣자마자 하던 작품을 멈추고 게르니카 제작에 돌입했다.
전쟁을 다룬 그림은 이전에도 많이 그려졌다. 현실 속 장면을 재현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 여타의 그림들과는 달리, 피카소는 각각의 상징을 담은 조각들을 그려 개인들이 전쟁으로 겪는 극단적인 고통을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 그렇게 게르니카는 반전의 상징이 됐다. 7번의 수정 과정을 사진으로 남긴 피카소는 주옥같은 말을 남겼다.
"예술가는 정치적인 존재인 동시에 처참한 상황이나 세상의 모든 역경이며 기쁨에 공감할 줄도 알고 자기방식대로 세상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존재입니다. 사실이 이러할진대 예술가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무관심할 수 있으며 무슨 배짱으로 여느 사람들과는 달리 세상에 무심할 수 있는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림은 결코 아파트를 치장하려고 그리는 게 아닙니다. 그림은 적에게 맞서서 싸우는 공격과 방어의 무기입니다."
나치가 파리를 점령했을 당시 게슈타포 장교가 피카소에게 '이 그림을 당신이 그렸냐'고 물었다. 피카소는 답했다.
"아니, 당신들이 그렸지."
게르니카는 가로 776.6cm, 세로 349.3cm에 달하는 벽화 크기의 대작이다. 이 그림은 스페인이 민주화될 때 고국에 반환하라는 피카소의 유언에 따라 1981년까지 뉴욕 현대 미술관에 보관하다가 이후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피카소의 시간이 '거꾸로' 간 이유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의 루이스는 아버지 성, 파블로는 어머니 성이다. 피카소는 어머니의 성만 따와서 19세 때부터 파블로 피카소로 사인했다.
그는 스페인 말라가에서 태어났다. 태어났을 때 숨을 쉬지 않아 산파는 아이가 죽었다고 생각했으나 먼 친척뻘의 의사였던 돈 살바도르가 살려냈다. 방법은 물고 있던 담배 연기를 아이 얼굴에 뿜은 것. 아기는 기침했고, 살아났다. 지금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이지만 이 이야기는 피카소의 전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메뉴다.
피카소의 아버지는 시립미술관 관리자이자 미술 선생님이었다. 무명 화가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피카소의 재능을 누구보다도 일찍 알아봤다.
그림에 필요한 기본은 아버지에게 배웠다. 피카소가 13세가 됐을 때 아버지는 비둘기를 그린 캔버스를 피카소에게 넘겨주며 비둘기 다리를 그리게 했는데, 이를 계기로 아버지는 모든 화구를 피카소에게 넘겨주고 다시는 붓을 들지 않았다.
이미 아들이 자신을 넘어섰음을 본 것이다. 화구를 물려받은 피카소는 기류를 탄 새처럼 날아올랐다. 어느 미술학교도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프라도 미술관이 그의 학교였고 그곳의 그림들이 그의 선생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