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공무원인 친구를 부러워했다. 그래서 술값 계산하라고 헸더니 "야, 공무원도 예전 같진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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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초등학교 동창회가 있었다. 사실 내가 다닌 시절에는 국민학교로 불렸다. 나와 내 친구들은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뀔 즈음 사회에 진출해서 지금은 50대를 훌쩍 넘어 중반으로 달려가고 있다.
대화의 주제는 언제나 그렇듯이 가벼운 안부로 시작해서 자녀들 근황으로 넘어갔다. 누구 아들은 졸업반인데 벌써 취업이 결정됐다느니 누구 딸은 이번 가을에 결혼한다느니 하는. 공식 자리를 마치고 친한 친구들끼리 따로 모여 마음속에 가뒀던 얘기를 터뜨렸다.
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쭉 함께 다닌 남자친구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 혹은 "별일 없지?" 아마도 청년 시절부터 나눴던 평범한 안부 인사일 텐데 요즘엔 다들 대답이 진지했다. "야, 말 마라. 힘들어 죽겠다." 직장인이든 자영업을 하든 사업을 하든 대답이 모두 그랬다.
직장에 다니는 친구는 사업(혹은 자영업)을 하는 친구를 부러워하고, 사업(혹은 자영업)을 하는 친구는 직장에 다니는 친구를 부러워한다. 부러운 이면에는 불안한 마음이 숨어있는 것 같았다. 대기업에 다니든 그보다 작은 기업에 다니든 자기 자리가 언제까지 보장될지 불안해하고, 사업을 하든 자영업을 하든 끝없는 경쟁이 불안하기만 한 듯하다.
그래서 다들 공무원인 친구를 부러워했다. 그래서 술값을 계산하라고 했더니 "야, 공무원도 예전 같진 않아" 한다. 예전 같지 않아도 친구들은 부럽다는 표정이었다.
인생, 전반전과 후반전으로 나뉜 경기
나와 내 친구들을 포함한 50대의 많은 남자는 불안감에 젖어 살아가고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은 50대 남자도 있겠지만. 왜 많은 이들이 불안해할까? 앞으로의 삶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흘러갈 것이라는 불확실성 때문은 아닐까? 우리가 사회에 진출할 때 막연하게 기대했던 것과 다른 현실을 보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우리가 봐왔던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의 삶을 돌아보자. 그 시대에는 은퇴하면 2세들이 노후를 지탱해줬다. 2세들을 어릴 적부터 양육하고 학교에 보내어 사회에 잘 적응하도록 보살핀 이유가 노후를 위한 암묵적 계약이었음을 우리네 아버지, 할아버지의 삶을 보며 자연스럽게 배웠다. 당연히 우리도 그래야 한다는 의무로 깨달았고.
그런데 지금 사회 분위기는 이전 세대와는 다르다. 은퇴를 하더라도 내가 나를 경제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게 대다수 우리 세대에게 닥친 미래일 것이다. 부모와 배우자는 물론 어쩌면 학자금 부채에 시달리며 변변한 직장도 얻지 못하는 자녀들까지. 결혼으로 독립시키기는커녕 자녀와 함께 늙어 갈 수도 있다. 물론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당신의 미래에 벌어지지 말란 법 또한 없다.
이런 불안한 시절에 경제 시스템 바깥으로 밀려난다면 어떤 심정이 될까? 그것도 아무런 준비도 없이 밀려난다면?
우리 인생을 전반전과 후반전으로 나뉜 운동 경기로 비유한다면 지금까지 교육받고, 취업하고 혹은 사업하며 살아온 인생은 전반전이라고 할 수 있다. 운 좋은 직장인이나 사업가는 그 기간이 훨씬 더 길어질 수도 있겠지만 많은 사람이 50대 즈음에 밀려 나오기 시작한다. 원하든 원치 않았든 전반전이 끝나 버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일부는 그동안의 경력을 바탕삼아 재취업을 하거나 사업에 뛰어들기도 하겠지만 모두가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퇴직금을 곶감 빼먹듯 하기보다는 뭐라도 하기 위해서 치킨집이나 커피숍 여는 걸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다.
그 뭐라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공백기를 겪기도 한다. 그 공백기가 어떤 이에게는 방황기가 될 테고 어떤 이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는 분투기도 될 테다. 그리고 어떤 이는 곧 시작될 인생 후반전을 위한 준비 시간으로 삼기도 할 거고.
내 인생의 하프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