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조약 개정안을 날치기 통과시키는 일본 국회(사진출처: 일본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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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처럼 정보 전달 수단이 많지 않았던 시대였음에도 '민주주의 농락'에 대한 충격은 일본 전국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미 군정을 통해 들여온, 길지 않은 민주주의 역사를 가진 일본이었지만 그 싹만은 조금씩 민중의 삶속에 뻗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성난 시민들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광장의 상징인 일본 국회 의사당 거리와 수상관저, 미 대사관 주변은 수많은 군중들로 채워졌고 시위는 한 달 가까이 이어졌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시위는 '안보조약 개정 반대'라는 당초 목적에서 나아가 반정부, 반미, 민주주의와 평화헌법 수호에 대한 부분까지 폭넓게 아우르기 시작했다. 규모 또한 전국 단위로 퍼져 나갔다. 6월 4일에는 전국적으로 560만 명의 시민들이 집회에 참석했다.
일본 역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아래로부터의 투쟁'에 당시 조약 개정안의 총책임자인 '기시 노부스케' 총리도 적잖이 당황했다. 그는 들불처럼 일어나는 시위대를 제압하고자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우익단체들과 폭력단까지 동원했다. 이렇게 동원된 우익단체는 암암리에 정부의 지원을 받아가며 시위대를 습격하고 폭력을 행사,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1960년 봄, 일본에서 벌어진 일
6월 15일은 일본 안보반대투쟁 최대의 분수령이었다. 이날 열린 시위에서는 지난 4일을 능가하는 580만 명이 참가했다. 최대 요지인 국회 의사당 거리에서는 국회에 돌입하려던 대학생들과 경찰이 대치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시위에 참석했던 22살의 대학생 '칸바 미치코'가 사망하게 된다.(폭력에 의한 사망인지, 시위 중 압사인지에 대한 의견은 엇갈리고 있다) 이후 시위는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극으로 치달렸고 우익단체와 폭력단의 습격, 시위대와 경찰 양측의 대치에 1천 명 가까운 부상자가 발생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