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 목사는 김 주석을 만나서 박용수의 '겨레말사전'을 선물했다.
사단법인 통일의 집
이것은 국가원수 간의 정상회담과 달리, 꽤 '아름다운 정상회담'이었다. 두 사람은 정말로 아름다운 분위기 속에서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이 대화가, 문익환이 대법원에 제출한 상고이유서에 담겨 있다.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온 뒤 감옥에 갔을 때 작성한 글이다.
<늦봄 문익환 전집> 제5권에 수록된 상고이유서에 따르면, 문익환과 김일성이 커다란 테이블의 양쪽에 멀찍이 떨어져 앉고, 북한 직원이 대화 내용을 기록하는 속에서 회담이 열렸다. 그런데 시작 전에 김일성(1912년 생, 당시 77세)이 "이거 너무 멀어서 안 되겠으니,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라며 문익환(1918년 생, 71세)을 옆 자리로 불렀다. 옆에 가서 악수를 나눈 뒤, 문익환은 이렇게 말했다.
"분단 50년을 넘기지 맙시다. 분단 50년을 넘기는 것은 민족적인 수칩니다."
김일성은 손을 덥석 잡으면서 "좋습니다, 해봅시다, 잘하면 될지도 모르지요"라고 화답했다. "이것은 45년 동안 남북을 갈라놓았던 분단의 장벽이 적어도 우리 두 사람 사이에서는 일순에 무너져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라고 문익환은 상고이유서에 썼다. 대법관에게 제출하는 글이므로 존댓말로 되어 있다.
허심탄회하고 격의 없는 분위기가 대화를 지배했을 뿐 아니라, 통일에 대한 민족의 열망과 현실 인식이 이들의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또 이들의 대화는 장차 다가올 역사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꽤 생산적이었다. 대화 내용을 들어보면, 2000년 이후의 남북정상회담들이 문·김 회담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음을 쉽게 느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도 두 사람의 대화는 정말 '아름다운 정상회담'이었다.
회담은 두 차례에 걸쳐 8시간 동안 진행됐다. 3월 27일 제1차 회담은 주석궁에서 열렸고, 4월 1일 제2차 회담은 김일성의 '답방' 형식으로 문익환 숙소에서 열렸다. 대화는 문익환이 사전에 준비한 주제를 토대로 진행됐다.
문익환은 교차승인 문제부터 제기했다. 미국·소련·일본이 남북한 양쪽을 승인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하나의 코리아'에 집착하지 말고 '두 개의 코리아'를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평화를 정착시키면서 통일을 지향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교차승인은 통일로 가는 과도기일 뿐이라고 그는 역설했다.
하지만 문익환은 더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했다. "김 주석의 부정적 태도가 너무 단호"했다고 그는 썼다. 하지만 김일성은 2년 뒤인 1991년 9월 18일 남한과 함께 유엔에 동시 가입하는 데 동의했다. 결과적으로 교차승인을 받아들인 셈이다. 유엔 동시 가입은 이 시기에 일시적으로 북미관계가 진전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문익환의 설득이 김일성의 심리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이젠 주체사상도..." 문익환의 도전적 설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