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권 기업들이 모여 있었던 육의전 터. 탑공공원 앞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그 같은 정경유착은 사신단 구성 때 특히 잘 나타났다. 옛날에는 사신단이 방문하는 기회에 국가 간의 무역이 이루어졌다. 약한 나라가 조공 명목으로 상품을 제공하면, 강한 나라는 회사(回賜, 답례) 명목으로 상품을 제공했다.
이런 공식 무역 외에 사신단원들의 개별 무역도 허용됐다. 사신단에 포함된 외교관·통역관·군관·행정직원 등은 장사할 물건도 함께 갖고 갔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짐을 운반하고 현지에서 물건을 매매할 개인 하인들을 사신단에 포함했다.
궁녀 출신인 장희빈(희빈 장씨)이 왕비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것과 관련이 있다. 장희빈 가문에는 통역관들이 많았다. 이들은 통역관 신분을 이용해 중국에 갈 때마다 장사를 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조정과 궁궐 사람들을 움직여 장희빈과 숙종이 자연스레 만날 기회를 만들어줬다.
변광석 부산대 HK전임연구원은 <우리 역사 속 부정부패 스캔들>에서 "희빈 장씨는 궁중의 나인으로 대궐에 들어왔다가 자의대비의 추천으로 숙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면서 "인동 장씨 역관 가문의 자금력과 결탁한 남인(당) 세력들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였다"고 말한다.
이처럼 사신단에 끼면 큰돈을 벌 수 있었기에, 거기 들어가기 위한 정경유착이 벌어지곤 했다. 연산군 아버지인 성종(재위 1469~1494년) 때 있었던 변처녕 스캔들도 그런 사건이었다.
1492년, 변처녕이 명나라에 가는 사신단의 부사(2인자)로 임명됐다. 음력으로 성종 23년 4월 17일자(양력 1492년 5월 13일자) <성종실록>에 따르면,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해 대상인인 조복중과의 유대관계를 강화하고자 했다. 그는 조복중의 신분을 무관으로 위조해 사신단 명단에 넣어줬다.
조복중은 '대기업 사장'이라는 점 외에도 정부 고위층의 관심을 끌 만한 요소가 있었다. 그는 성종의 총애를 받아 궁궐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궁녀 조씨의 조카였다. 그런 이유로 변처녕이 사신단에 넣어줬던 것이다.
하지만 사신단 출발 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조복중이 무관 신분으로 위장하고 사신단에 포함됐다는 사실이 사헌부(검찰청)에 의해 드러났다. 결국 이 사건은 약 50명이 처벌받는 대규모 '게이트'로 번졌다. 하지만 조복중은 처벌받지 않았다. 돈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궁녀 조씨가 구명운동을 펼쳤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달 업무에서 터진 대형 비리
정부 조달 업무에서도 정경유착이 일어나곤 했다. 지금 소개할 사례도 성종 때 사건이다. 당시까지 조선 최대의 비리 스캔들로 회자된 사건이다. 주로 옷감을 조달하는 제용감이란 관청에서 종4품 첨정 벼슬을 하던 김정광이 벌인 정경유착 사건이다.
제용감 4인자인 김정광은 상인들의 뇌물을 받고 추포(하급 피륙)를 세포(고급 피륙)로 속여 입고했다. 리베이트를 받고 조달 부정을 저지른 것이다. 연루된 상인이 330명이 넘었으니 얼마나 대단한 규모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김정광은 황당한 범죄까지 함께 저질렀다. 뇌물수수죄가 발각될 기미가 보이자 공범자인 상인 20명을 데리고 창고에 들어가 증거를 없애는 대담함까지 발휘했다. 상인 20명과 함께 창고에 잠입해 피륙 양쪽에 붙은 식별표를 모두 제거해 버렸다. 반입 경로를 숨기기 위해서였던 듯하다.
김정광을 비롯한 주요 연루자들은 곤장 100대를 받고 지방 공노비(관노)로 전락했다. 김정광을 사형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했지만 성종은 수용하지 않았다. 곤장 100대를 제대로 맞으면 사람이 죽지만, 형리가 살살 때리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금전이 연루된 비리 사건은 법정형보다 낮은 형벌로 마무리되는 일이 많았다.
말발굽에 값어치 있는 금속 넣어 주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