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있는 건축가이자 지식인 김중업평양 출신인 그는 ‘고향’을 떠나 남한에 정착하지만 ‘고국’으로부터 추방 당한다. 김중업은 이런 자신의 신세를 ‘유민’(流民)이라고 말한 적 있다. 반골과 야인의 삶을 살지만 그는 건축가와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군사정권의 개발 정책을 비판했다. 김중업건축박물관에서 재촬영한 사진.
백창민
김중업은 명보극장(1956), 부산대학교 본관 및 정문(1958), 서강대학교 본관(1958), 유유산업 공장(1959) 같은 초기 작품을 필두로, 1962년에는 주한프랑스대사관을 선보인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주한프랑스대사관은 김수근의 공간 사옥과 함께 한국 현대건축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정인하 교수는 김중업의 주한프랑스대사관을 '한국 건축사의 고전'으로 꼽으며, '동시대 서구 건축을 수용하면서 한국적 정서를 가장 뛰어나게 표출하고, 한국 전통 건축의 지붕을 현대적 이미지로 승화시키면서, 독특한 시적 울림을 주는 건축물'이라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이후 김중업은 유엔묘지 채플(1963), 제주대학교 본관(1964), 서산부인과 병원(1965), 부산 UN묘지 정문(1966), 국제화재해상보험회사 사옥(1968), 삼일로빌딩(1969, 현 삼일빌딩)으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1970년 완공된 31층짜리 삼일로빌딩은 롯데호텔이 완공된 1979년 전까지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삼일로빌딩은 3.1 만세운동을 기리는 뜻을 담아 1970년 3월 1일 문을 연다).
건축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그는 와우아파트 붕괴, 청계천 주민 성남 강제 이주(광주대단지 사건) 같은 박정희 정권의 무분별한 개발정책을 비판한다. 정부 비판으로 김중업은 반체제 인사로 분류되어 1971년 11월 가족을 두고 해외로 추방 당한다. 이전에도 그는 5.16 쿠데타 과정에서 육사 생도의 관제 데모와 정부가 추진한 애국선열상 건립 계획, 대통령 측근의 동빙고동 호화주택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 바 있다.
5.16 쿠데타 직후 육사 생도가 군사혁명 지지 시위를 하자 김중업은 "지금이 어느 땐데 관제 데모냐"라고 말해 언론에 크게 보도되고, 와우아파트는 붕괴 사고 전부터 언론을 통해 문제점을 지적했다. 박정희 측근이 동빙고동에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한 호화주택을 짓자, '로마 말기 현상'에 비유하며 언론에 글을 썼다.
이 과정에서 김중업은 중앙정보부와 수사기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김중업이 얼마나 소신 있는 건축가이자 지식인인지 알 수 있는 일화다. 삼일로빌딩 설계비를 받지 못한 상황에서 보복성 세무 조사를 받자 김중업은 성북동 집까지 처분해야 했다. 7년에 걸친 해외 망명 기간 동안 김중업은 건축가로서 국내에서 쌓은 기반을 잃는다.
서슬 퍼런 군사 정권 하에서 그는 현실 문제를 외면하지 않는 '사회참여형 건축가'였다. 김수근을 포함한 동시대 다른 건축가와 김중업의 도드라진 차이점이 바로 이 대목이다.
한국을 떠나 있는 동안 김중업은 프랑스와 미국에서 활동을 이어간다. 1978년 11월 귀국해서 1988년 5월 11일 66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국교육개발원 신관(1979), 육군박물관(1982), 진주 문화회관(1982), 중소기업은행 본점(1983), 목포 문화방송국(1984), 올림픽공원 조형물(1985), 광주 문화방송국(1986) 같은 작품을 남긴다.
김중업의 초기 작품, 건국대학교 언어교육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