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특위의 재판.
위키백과
반민특위는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을 계승한 1948년 헌법 제101조에 근거해 만들어진 기구다. 이 헌법 제101조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라고 규정했다.
사실, 특별법의 제정 필요성은 미군정 시기(1945~1948)에도 제기됐었다. 미군정 시기의 입법기관인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1947년 7월 2일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를 제정한 일이 있다. 하지만 미군정의 거부로 무산됐다.
일본이 항복한 1945년 8월 당시만 해도, 미국은 중국과 연합해 소련을 견제한다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 국민당이 공산당에 밀리자, 중국에 대한 미련을 거두고 일본과의 동맹을 저울질하게 됐다.
미군정이 위 특별조례를 거부한 것은 한국에서의 친일 청산이 미일동맹과 소련 견제에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미국의 거부로 시간이 지연되는 바람에, 해방 3년이 지난 뒤에야 반민특위가 출범할 수 있었다.
임시정부를 계승한 대한민국정부가 출범한 지 1개월여 뒤인 1948년 9월 22일, 반민특위의 법적 근거인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이 공포되고 이에 의거해 10월 12일 반민특위가 구성됐다. 반민특위가 공식 활동에 착수한 것은 이듬해였다. 1949년 1월 5일,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에 있었던 중앙청 205호에 사무실이 마련됐다. 3일 뒤 친일 기업가 박흥식을 체포하는 것으로 반민특위가 본격 가동됐다.
반민특위는 이승만 정권과 미국의 견제 속에서도, 민족적 열망 및 헌법 조문에 근거해 출범했다. 친일 청산을 완수하고 한국인을 위한 한국을 세우고자 등장했다. 하지만, 성과는 거의 내지 못했다.
1997년에 한국민족운동사학회가 발행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17권에 실린 역사학자 이동일의 '1948~49년 반민특위의 구성과 피의자 기소 내용에 관한 분석'에 따르면, 1949년 10월 해체 때까지 반민특위에 입건된 사건은 총 682건이다. 그중 검찰에 송치된 것은 559건이다. 그리고 재판이 종결된 것은 고작 38건이다.
38건 중에서 형벌이 선고된 것은 12건에 지나지 않는다. 징역 1년에 집행유예가 4건, 징역 2년에 집행유예가 1건, 징역 1년이 3건, 징역 1년 6월이 1건, 징역 2년 6월이 1건이다. 그리고 무기징역과 사형이 각 1건이다. 독립투사 유관순이 받은 3년형보다 센 형벌은 무기징역과 사형뿐이었다.
하지만 무기징역 및 사형을 포함해 나머지 형벌은 제대로 집행되지 않았다. 피고인들은 1950년 봄까지 전원 석방됐다. 그뿐 아니다. 복권 조치까지 받아 명예를 다 회복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친일파가 공식적으로 한 명도 없는 나라가 됐다. 반민특위의 활동은 어처구니없는 결과로 귀결된 것이다.
친일파, 반민특위 제동에 나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