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쪽의 두 사진은 광주 망월동 5·18묘역. 아래쪽 왼쪽은 망월동 묘역 땅바닥에 묻힌 ‘전두환 대통령 각하 내외분 민박 마을’ 기념비, 오른쪽은 기념비를 이곳에 묻은 경위를 설명하는 안내문.
김종성
전두환을 지탱해주는 '힘'
그런데 전두환의 외면적 뻔뻔함을 지탱하는 것이 오로지 내면적 뻔뻔함만은 아닌 듯하다. 내면적 뻔뻔함만으로 그런 외형을 유지하기엔 세상의 적들이 너무나 많고, 그 시간도 너무나 길게 이어지고 있다. 그의 외면을 지탱해주는 '또 다른 힘'이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언론보도를 통해 많이 알려졌듯이, 전두환은 대인관계가 상당히 원만하다. 장교 시절에도 그랬다. 전두환 후임으로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는 1970년에 전두환 대령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이 된 일을 회고하면서 "당시 고급 장교들 사이에서 전 대령의 이름은 능력이나 최고통수권자의 신임 면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라고 말했다.
전두환은 주변 사람들에게 돈도 잘 쓰는 듯하다. <주진우의 이명박 추격기>에서는 이명박·전두환의 자금 문제를 설명하다가 "코미디언 이주일씨가 사망했을 때 전두환이 낸 조의금이 1억 원이라는 설과 5000만 원이라는 설이 아직도 싸우고 있다"라고 말한다.
또 하나 유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전두환이 민중혁명을 상당히 의식하며 살아왔다는 점이다. 6월항쟁 때인 1987년 6월 17일 저녁 안가에서 노태우 민정당(민주정의당) 대통령후보, 안무혁 안기부장(국정원장), 이춘구 민정당 사무총장, 김윤환 정무1장관 등과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도 그런 내면 심리가 표출됐다. <노태우 회고록> 상권에 따르면, 전두환은 이런 말들을 했다.
"민중혁명이 성공되게 할 수는 없어."
"우리가 정치를 하는 데 있어 과거에 하던 식, 군대를 동원하고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그런 걸 반복해서는 안 되지 않겠어."
"우리가 지금 밀려가고 있는데, 나는 카드를 다 썼어요."
"안기부장, 이제는 데모 보고 올리지 마라. 나는 청와대에 쳐들어올 때까지는 꼼짝 안 한다. 천만 명이 나와도 상황을 보고하지 말고 대책을 보고해야 돼요."
민중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한 전두환
전두환이 민중의 움직임에 민감하다는 점은 이승만·박정희·박근혜와의 비교에서도 드러난다. 전두환과 이들의 공통점은 민중의 격렬한 도전에 직면한 대통령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그중 정권을 지킨 사람은 전두환뿐이다. 이승만은 4.19로 쫓겨났고, 박정희는 민중항쟁 와중에 내부 분열이 일어나 부하의 배신으로 죽었고, 박근혜는 임기 중에 권한이 정지되더니 임기를 못 마치고 감옥에 들어갔다.
세 사람과 달리 전두환은 6월항쟁을 겪고도 임기를 무사히 마쳤을 뿐 아니라, 같은 편에게 정권을 넘겨주는 데도 성공했다. 또 이승만의 자유당과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이 '주군'의 퇴장과 거의 동시에 주류 정치권에서 퇴장한 데 반해, 전두환의 민정당은 민자당(민주자유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을 거쳐 자유한국당으로 이어지며 아직까지 주류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는 민중의 동향에 대처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면에서 전두환이 이승만·박정희·박근혜보다 기민하고 민첩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