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김백일 동상 철거 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는 3월 1일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내 김백일 동상 옆에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를 세웠다.
윤성효
그는 친일파 김백일을 사례로 들었다. 그는 전국 곳곳에 동상이나 기념물이 세워진 대한민국 국군사에서 영웅처럼 추앙받는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항일독립군을 진압하던 간도특설대의 장교지만, 6.25 전쟁 당시 무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서울 국립 현충원 장군 묘역에 잠들어 있다.
다른 곳에선 생소해 할지 몰라도, 이곳 광주에서는 역사에 관심 있는 고등학생 정도라면 대개 그에 대해 알고 있다. 몇 해 전 그의 이름을 딴 도로와 초등학교가 시민들의 항의로 일사천리 개명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지역 신문은 '민주화의 성지'에 버젓이 친일파가 득세하고 있다며 대서특필했다.
지방정부는 이에 화답하며 기존의 '백일로'를 '학생독립로'로, '백일초등학교'를 '성진초등학교'로 간판을 바꿔달았다. 도로변에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이 자리하고 있고,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주도했던 학생들의 결사단체명이 '성진회'였던 까닭이다. 참고로, '성진(醒進)'은 직역하면 '깨어 나아가자'는 뜻이다.
그는 김백일을 '영웅'은커녕 '악당'으로 간주했다. <친일인명사전>과 인터넷 등에 탑재된 김백일의 행적을 수차례 반복해 읽었다면서, 그의 위상이 여전한 것이야말로 친일 잔재 청산 노력이 말뿐이라는 증거라고 말했다. 그는 김백일의 삶이 곧 우리 현대사를 비추는 거울이라며, 친일 잔재 청산의 '시범 케이스'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언뜻 투박하고 과격한 그의 주장을 약간 다듬어 옮겨보면 이렇다. 우선 해방 후 '백일'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것을 두고, 그간의 친일 행위를 '세탁'하려는 목적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의 본명은 '김찬규'로, 해방 직후 고향인 북에서 월남하면서 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료에 의하면, 온 세상이 붉은 공산당의 세상이 되어도 홀로 푸른 하늘의 해로 남겠다는 뜻에서 스스로 '백일(白日)'로 정했다고 한다. 그가 이름을 바꾸고 고향을 등진 이유를 기회주의적 처신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당시 남쪽에선 숱한 친일파들이 미군정에 의해 중용되고 있었으니, 그에게 38선 이남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을 거라고 해석했다.
개명 사유가 사실이라면, '빨갱이'의 어원도 그에게서 찾아야 하는 것 아니냐며 반문하기도 했다. 이름 자체가 '빨갱이'와 함께할 수 없다는 뜻이라는 거다. 오로지 '빨갱이 소탕'이 악질 친일파로 살아온 그가 해방된 나라에서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달은 결과가 '백일'이라는 이름이라고 설명했다.
푸른 하늘의 해, 곧 '청천백일(靑天白日)'은 중국의 국공내전 당시 공산당에 패해 타이완으로 밀려난 국민당의 상징으로, 현재 타이완의 국기로 사용되고 있다. 말하자면, 내포된 의미 자체가 '반공(反共)'인 셈이다. 이를 차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해방 후 그의 삶은 '반공'으로 점철됐고, 그와 맞서면 무조건 '빨갱이'였다.
순식간에 '친일'에서 '반공'으로 옷을 갈아입는 대표적인 인물이니만큼, 더 확실한 '예우'가 필요하다고 비아냥거렸다. 그의 이름과 행적이 한국사 교과서에 실리지 않은 건 납득할 수 없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만약 그의 이름이 교과서에서 다뤄진다면 '김백일류'의 악질 친일파들이 굴비 엮듯 줄줄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실 그의 삶은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던 자들이 애국자로 돌변하는 과정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그들은 관동군이나 고등계 형사로 일하다 해방 후 미군정 시기 군사학교에 입학해 국군이 되고, 제주 4.3과 여순 사건, 6.25 전쟁 등을 기회 삼아 승승장구하며 우리 사회 기득권층에 편입됐다. 말하자면, 그는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기득권층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다.
현충원 김백일 묘 그대로 두자고 한 까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