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공화당 소공동 당사 현판식1966년 6월 4일 정일권 국무총리와 김종필 공화당 의장이 소공동 당사에 민주공화당 현판을 내걸고 있다. 공화당 소공동 당사는 일제 시대 경성부립도서관 건물이었다. 경성부립도서관은 해방 후 남대문도서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남대문도서관은 남산으로 이전하면서 남산도서관으로 이름을 다시 바꾼다.
국가기록원
공화당과 도서관의 인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66년 6월 1일부터 1972년 9월 28일까지 6년 동안 공화당은 소공동 건물을 당사로 썼다. 공화당 소공동 당사는 다름 아닌 일제 시대 경성부립도서관, 즉 남대문도서관 건물이다.
남대문도서관은 1964년 12월 31일 남산으로 이전하면서 '남산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꾼다. 남대문도서관이 남산으로 옮기면서 비운 건물에 공화당이 입주, 6년 동안 당사로 쓴 것이다. 남대문도서관 건물은 대한제국 영빈관인 대관정이 있던 곳으로 일제가 한국주차군사령부로 쓰기도 했다.
공화당은 6년 동안 소공동 옛 남대문도서관 건물을 임대해서 썼는데, 건물 매입도 고려했다고 한다. 건물 매입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을 의식해 공화당이 망설이는 사이, 1967년 효성물산이 이 건물을 인수한다. 공화당은 1972년 후암동 당사를 매입하면서 세입자 신세에서 벗어난다.
도서관 건물을 당사로 쓰다가 당사로 매입한 건물이 다시 도서관으로 바뀌었으니, 공화당은 도서관과 남다른 인연을 가진 정당으로 기록될 듯싶다.
공화당사가 도서관이 된 사연은
1979년까지 대한민국에 군림한 공화당 중앙당사는 왜 도서관으로 바뀌었을까? 1979년 박정희 사후 12.12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전국으로 비상계엄을 확대한다. 이 조치로 정치 활동이 금지되고, 대학에 휴교령이 떨어지며, 김대중과 김종필 등 주요 정치인과 민주화 운동 인사가 체포된다. 광주민주항쟁을 유혈 진압한 것도 이때다.
1980년 9월 1일 전두환은 최규하에 이어 대통령이 된다. 1979년 12.12 쿠데타 이후 264일 만에 권좌에 오른, 누구 말처럼 '세계에서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였다. 권좌에 오른 전두환은 1981년 10월 제5공화국 헌법을 공포한다.
제5공화국 헌법을 통해 신군부는 공화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을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당사를 포함한 공화당의 전 재산은 전두환이 창당한 민주정의당(민정당) 자산으로 귀속된다.
1980년 12월 10일 공화당 청산위원회는 공화당의 후암동 중앙당사(대지 525평, 연건평 2천1백 평)와 송파구 가락동에 있는 3층 건물(대지 1만2000평, 연건평 1600평), 전국 8개 시도에 있던 시도당 사무국 건물과 사무비품 일체를 민정당에 '무상양도'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100억 원대로 추산되는 공화당 자산을 '무상인수'한 민정당은 가락동 훈련원과 8개 시도당 사무소는 그대로 쓰되, 남산에 있던 공화당 중앙당사만 매각하기로 한다.
전두환의 민정당은 왜 공화당 중앙당사만 매각했을까? 신군부는 남산 공화당 중앙당사가 갖는 상징성이 강하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박정희 뒤를 잇는 군부 통치 이미지를 희석시키고 싶었던 걸까. 새롭게 권력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는 공화당 당사를 도서관으로 '급조'한다. 1980년 12월 민정당은 공화당 중앙당사를 서울시에 서둘러 매각한다. 공화당사를 인수한 서울시는 1981년 2월 용산도서관 설치 조례(서울특별시 조례 제1488호)를 공포하고 1981년 4월 21일 용산도서관을 개관했다. 이것이 불과 5개월 만에 공화당 중앙당사가 도서관으로 '변신'한 경위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죽지 않았다면 그는 독재를 이어갔을 것이고 용산도서관 건물은 공화당 중앙당사로 계속 쓰였을 것이다. 용산도서관은 박정희의 죽음과 신군부 쿠데타 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탄생했다.
도서관은 왜 자신의 역사에 소홀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