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난징에서 김의한과 정정화, 김자동동농 김가진의 아들 김의한, 며느리 정정화는 중국에서 임시정부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사진 속 아이는 김의한과 정정화의 아들 김자동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가진뿐 아니라 그의 아들 성엄 김의한, 며느리 수당(修堂) 정정화(鄭靖和)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김가진의 아들 김의한은 아버지와 함께 상하이로 망명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김의한은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1931년 김구, 안공근, 엄항섭과 함께 한인애국단을 만들었다. 1932년 1월 8일 도쿄 경시청 정문 앞에서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흥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 모두 한인애국단원이다.
김의한 일가는 상하이(1919), 항저우(1932), 전장(1935), 창사(1937), 광둥(1938), 류저우(1938), 치장(1939), 충칭(1940)으로 임시정부가 옮길 때 늘 함께 했다. 임시정부의 피난길은 4000km에 이른다. 김의한은 1936년 장시성 우닝현 쑨원기념 중산도서관 관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아버지와 아들 2대에 걸쳐 '도서관장'을 지낸 집안 내력이 이채롭다.
해방 전 김의한은 광복군 창립과 훈련에 관여했다. 해방 후 한국독립당 활동에 참여했고, 1948년 남북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김구와 함께 삼팔선을 넘어 남북 협상에 참여했다. 한국전쟁 때인 1950년 9월 28일 납북돼 1964년 10월 9일 사망했고 평양 재북인사묘역에 묻혔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북한 정부로부터 조국통일상을 추서 받았다.
동농의 며느리 정정화는 시아버지와 남편이 상하이로 망명한 후 임시정부 안살림을 도맡았다. 이 과정에서 10년 동안 여섯 차례나 상하이와 국내를 오가며 독립운동 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기도 했다.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대한애국부인회에서 활동했다. 1946년 귀국할 때까지 임시정부 뒷바라지에 모든 걸 바쳤다.
김구, 이동녕, 이시영 같은 임시정부 인사 중 그녀가 지은 밥을 먹지 않은 사람이 없고, 임시정부 가재도구 중 그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1940년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에 참여했고 남편 김의한과 함께 광복군 창립에 기여했다. 한국전쟁 때 노모를 모시기 위해 서울에 남았던 그녀는 부역 혐의로 종로경찰서에 끌려가 일본 경찰 출신에게 모욕을 당한 후 풀려나기도 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고 1991년 사망 후 대전 국립현충원에 묻혔다.
독립운동에 대한 동농 집안의 헌신은 2대에 그치지 않는다. 김가진의 둘째 아들 김용한은 의열단 김상옥 의사 사건에 연루돼 일제 경찰에 심한 고문을 받았다. 이로 인해 김용한은 정신이상을 앓다가 한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용한의 아들이자 김가진의 손자 김석동은 광복군 최연소 대원으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받고 국립 대전현충원에 묻혔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이 있다. 한 사람만 독립운동을 해도 3대가 망한다는 이 나라에서 동농의 가문은 3대가 독립운동에 헌신한 집안이다. 이 정도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로도 설명이 부족하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은 대한민국은 이 집안에 큰 빚을 졌다.
청운문학도서관과 동농 김가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