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키즈였던 나는 언제라도 들을 수 있는 라디오인 팟캐스트에 금방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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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키즈'라고 적고 잠시 턱을 괴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지금처럼 똑같이 책상에 앉아 펜을 들어 글씨를 쓰던 적이 있었다. 책상에 앉아 자습서를 펴서 문제를 풀었던 시절이니 한 이십 년은 거슬러 올라야 할까.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대학 입학 직전까지 이어졌던 공부, 문제, 학원, 암기, 시험의 시간 속에서 유일하게 집에서 공부하는 것이 좋았던 이유는 책상 한 편에 놓인 스테레오 오디오 때문이었다. 카세트 테이프, 씨디, 라디오가 모두 지원되는 모델이었는데, 라디오를 듣다가 카세트 테이프로 방송을 녹음하는 것이 매일의 일과였다.
기억난다. 이휘재 씨가 진행하던 <별이 빛나는 밤에>, 박철 씨가 진행하던 <두시탈출>, 정지영의 <스위트뮤직박스>. 이런 라디오는 요일마다 달라지는 코너를 외우고 있을 정도로 많이 들었고 정을 주었고 각별히 기억했다.
또 기억난다.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를 귀로 들으며 수학과 과학 문제를 풀었던 순간이 기억난다. 이상하게 라디오가 공부를 방해하지 않았다. 라디오 속 당신들의 목소리는 그것대로, 나의 공부는 또 그것대로 같은 시간 속에 각자의 방식대로 흘러갔다. 중요한 건 항상 라디오를 들었다는 거다. 이제 정신을 차리고 다시 떠올려 본다. 라디오 키즈, 맞다.
라디오에 빠져들었던 학창 시절처럼 팟캐스트의 세계에도 겉잡을 수 없이 손쉽고 빠르게 스며 들었다.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흐르며 팟캐스트 방송이 다양해졌고 그만큼 찾아 들을 것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팟캐스트는 더 이상 '다시 들을 수 있는 라디오' 수준이 아니었다. 이들은 이미 한 번 방송된 것을 편집하여 다시 방출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팟캐스트로 시작해서 자리잡은 이들이 많아졌다.
그만큼 방송의 진행, 소재에 관한 자유도 또한 높아졌고 나는 이들 방송을 잡식하기 시작했다. 정치, 시사, 역사, 만화, 게임, 음악... 이러한 팟캐스트의 열광 속에서 <나는 꼼수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또 최근 <유시민의 알릴레오> 같은 방송이 탄생했고 그들의 성장과 함께 나의 팟캐스트 여행도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끝내 나는 팟캐스트 키즈는 되지 못했다. 다시 한 번 턱을 괴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팟캐스트를 들은 것이 꽤 오래 전 일이었다. 너희들의 키즈라 불리는 것에는 영 자신이 없었다.
왜일까. 왜 여전히 라디오 키즈라는 것을 훈장처럼 자랑스러워 하면서도 그 이후 세대의 미디어에는 끝내 정착하지 못한 걸까. 이유는 단 하나, 당신들의 음성에 시간이 흐르고 있는지 그것 때문이었다.
어제였다. 명절을 지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운전을 하며 라디오를 켰다. 주파수 93.1 메가헤르츠. 방송은 KBS 클래식FM의 <노래의 날개 위에>. 스피커로 흘러 나오는 바이올린 협주곡의 선율이 꽉 막힌 올림픽대로 위로 흘러 다녔다. 이 음악은 지금 이 순간에만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 방송을 지금 이 순간 이후에도 다시 찾아 들을 수 있는 것임을 분명 안다. 그러나 지금 이 라디오와 음악이 전해주는 긴장감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 이 음악을 듣는 이 시간만큼은 아무리 애를 써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토록 당신들의 선율에 귀를 기울이는 것 아닌가, 나는 그것을 떠올리고는 라디오 볼륨을 좀 더 높였다. 뒷좌석의 아내와 아이는 피곤함에 잠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는 다시 들을 수 없다는 것,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 더 간절한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거였다. 잠시 조우했다가 스치고 헤어지기에 더 강렬했던 거다. 바다 위를 떠 다니는 유빙처럼.
시계탑에 총을 쏘고
손목시계를 구두 뒤축으로 으깨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시계 방향으로
당신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우리는 천천히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처럼,
- 신철규 시인의 <유빙>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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