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3월, 선거 벽보 포스터(대통령후보 이승만, 조병옥, 부통령후보 장면, 이기붕, 김준연 등)
자료사진
자유당 이승만 정권은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 1959년 이승만의 정적(政敵) 조봉암을 사형으로 제거하고, 선거 직전 경쟁자 조병옥 박사가 급사(急死)한 상황에서 자유당은 왜 부정선거를 저질렀을까?
이승만의 네 번째 대통령 당선에는 차질이 없었으나 당시 85세였던 이승만의 건강이 문제였다. 1954년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만들어진 헌법에는 "대통령이 궐위된 때에는 부통령이 대통령이 되고 잔임 기간 중 재임한다"는 조항(헌법 제55조 2항)이 있었다. 자유당은 고령인 이승만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뒤를 이을 부통령을 차지하지 않으면 정권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자유당의 선거 부정은 1956년 대선에서 조봉암이 "투표에 이기고 개표에 지고"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유명(?)했지만 3.15 부정선거는 도가 지나쳤다. 유권자 매수, 깡패 동원, 대리 투표와 투표함 바꿔치기, 득표수 조작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부정선거로 득표율이 지나치게 높을 것을 우려한 경찰은 이승만 80%, 이기붕 70~75%로 득표율을 낮추라는 지령을 전국 개표소에 전달하기도 했다.
개표 결과 일부 지역에서는 이승만과 이기붕이 얻은 표가 지역 유권자 수보다 더 많았다. 유시민이 <나의 한국현대사>에서 지적한 것처럼 "단순한 '부정선거'가 아니라 완전한 '조작선거'"였다.
마산에서는 3월 15일 투표 당일부터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마산에 있던 47개 투표소 중 야당 참관인이 참석한 투표소는 세 곳뿐이었고, 곳곳에서 투표용지조차 받지 못한 시민의 항의가 들끓었다.
투표소에서 부정선거 현장을 목격한 민주당은 곧바로 선거 포기를 선언하고 시위를 주도했다. 정부 수립 이후 최대 규모 반정부 시위이자, 4.19 혁명의 발화점이 된 '3.15 의거'의 시작이었다. 마산에서 일어난 시위 과정에서 8명이 죽고 70명 넘는 사람이 다쳤으며 200여 명이 연행됐다. 이 과정에서 마산상업고등학교에 입학 예정이던 김주열군이 실종됐다.
3.15 의거가 4.19 혁명이 되기까지
실종됐던 김주열군의 시신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면서 마산 시민의 분노가 폭발했다. 김주열군은 3월 15일 시위에 참여했다가 실종, 27일 만에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참혹한 모습으로 발견됐다.
시위대는 관공서와 파출소를 공격했고, 경찰이 발포하면서 2명이 사망했다. 4월 11일 밤부터 마산에서 시작한 시위는 12일과 13일에도 이어졌고 마산에서 가까운 지역으로 확산됐다. 4월 11일부터 마산과 주변 지역에서 시위가 일어났지만 서울은 일부 고등학생 시위를 제외하고 4월 18일까지 잠잠한 상황이 이어졌다.
4월 18일, 고려대 학생 3천여 명이 교내에 모여 선언문을 낭독하고 교문을 나섰다. 학교를 나선 고대생은 국회의사당(지금의 서울시의회 건물) 앞에 모여 연좌시위를 벌였다. 저녁 무렵 시위를 마친 학생 시위대가 청계천 4가에 도착했을 때 100여 명의 깡패가 나타나 학생을 집단 구타했다. 이 사건이 다음날 신문에 크게 보도되면서 운명의 날인 4월 19일이 밝았다.
서울의 각 대학 학생은 교문을 나서 국회의사당 앞에 모였고, 점심 무렵에는 중앙청과 경무대 방향으로 향했다. 시위대가 경무대 앞 최후 저지선까지 진출하자 경찰은 발포했다. 이 총격으로 21명이 죽고 172명이 다쳤다. 경무대뿐 아니라 4월 19일 오후 이기붕 집 앞에 몰려든 시위대 2명이 경찰 발포로 숨지기도 했다.
오후에 중·고등학생이 합류하면서 서울의 시위대는 20만 명으로 불어났다. 이승만 정권은 서울 일원에 경비계엄령에 이어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속되는 시위와 경찰의 발포 과정에서 사상자가 크게 늘었다. 4월 19일 하루 동안 서울에서만 104명(경찰 3명 포함)이 시위 과정에서 사망했다. 이날 시위는 서울뿐 아니라 부산, 광주, 대구에서도 이어졌는데, 경찰 발포로 부산에서 13명, 광주에서 6명이 사망했다. 역사학자인 서중석의 표현대로 '피의 화요일'이었다.
시위는 4월 20일 이후 전국으로 확산됐다. 4월 25일에는 27개 대학 약 300명의 교수가 모여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시위에 참여했다. 4월 26일, 시위대가 탑골공원에 있던 이승만 동상을 쓰러뜨리고 이기붕 집까지 끌고 갔다.
같은 날 오전 10시 30분,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 성명이 발표됐다. '승리의 화요일'인 이날 전국에서 일어난 시위로 24명이 숨지고 113명이 부상을 입었다. 4월 28일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나 사저인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로부터 한 달 후인 5월 29일 이승만은 김포공항을 떠나 하와이로 향한다. 1965년 7월 19일 90세로 사망할 때까지 이승만은 다시는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서중석은 대규모 시위가 4월 19일 하루가 아닌 4월 내내 이어졌다는 점에서 '4.19 혁명'이 아닌 '4월 혁명'으로 불러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의 지적처럼 1960년 4월은 '혁명의 달'이었고 '제2의 해방'이었다.
혁명을 혁명이라 부르지 못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