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당(無爲堂)과 좁쌀 한알의 호를 즐겨썼던 장일순 선생의 묘. “내 이름으로 되도록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1994년 5월 22일, 67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했다.무위당(無爲堂)과 좁쌀 한알의 호를 즐겨썼던 장일순 선생의 묘. “내 이름으로 되도록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1994년 5월 22일, 67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했다.
최장문
장일순이 한살림운동에 열정을 쏟고 있던 1980년대 중후반 한국사회는 격동기였다.
1986년 2월 12일 신민당과 민추협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 1000만명 서명운동, 4월 28일 서울대생 김세진ㆍ이재호 분신자살, 7월 2일 부천서 성고문사건 폭로, 10월 28일 건국대사건,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4월 13일 전두환 호헌조치 발표, 5월 1일 통일민주당 창당, 6월 9일 연대생 이한열 시위 중 최루탄 맞아 중상, 6월 10일 민주항쟁 시작, 6월 26일 전국 37개 도시에서 100만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대표 6ㆍ29 항복선언.
이렇게 진행된 정국은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지고 1987년 12월 16일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3김 (김대중ㆍ김영삼ㆍ김종필)을 제치고 당선되었다. 노태우는 전두환과 함께 12ㆍ12 군부 하극상과 5ㆍ17 신군부 쿠데타를 일으킨 제 2인자였다. 이같은 정국의 변화를 소개한 데는 까닭이 있다.
노태우는 1988년 2월 25일, 제13대 대통령에 취임하기에 앞서 장일순에게 비밀리에 측근을 보냈다. 그는 전두환과 동향으로 같은 뿌리이지만, 6월항쟁을 지켜보면서 민중의 역량을 두렵게 여겼다. 해서 전두환식 통치로는 정권유지에 한계가 있다고 보고, 다른 방향을 모색하였다.
노태우가 1차적으로 점찍은 인물은 광복군 출신인 전 고려대학 총장 김준엽이었다. 안기부장 안무혁을 자택으로 보내 입각을 제안한데 이어 며칠 뒤에는 노태우가 직접 승용차를 보내 만나길 원했다. 서울 동빙고 '안가'에서 만난 노태우는 국무총리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으나 김준엽은 학자로서 남고 싶다며 이를 거절했다.
2차로 점찍은 사람이 장일순이었던 것 같다.
그의 폭넓은 식견과 다양한 재야의 인맥, 그리고 저간의 활동, 강원도 출신이라는 정치적 무채색의 지역성, 무엇보다 표면에 드러내지는 않지만 반독재 투쟁의 핵심인물이라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