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양 이병의 체포 사실을 보도하는 1992년 9월 24일자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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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 합당만큼의, 어쩌면 그 이상으로 위력적인 두 건의 내부고발이 있은 지 1년 반 뒤 또다른 사건이 터진다. 제14대 총선을 이틀 앞둔 1992년 3월 22일이었다. 이 선거에서 민자당은 4년 전의 여소야대 참패를 설욕해야 했다. 13대 총선 때 도합 219석(민정 125, 통일민주 59, 신민주공화 35)을 획득한 세 당이 3당 통합을 이룬 뒤에 치러지는 첫 선거이므로, 전체 299석에서 과반수를 훨씬 넘는 압도적 대승을 거둬야 했다. 그런 선거가 있기 2일 전, 24세의 육군 중위 이지문이 세상을 놀라게 하는 내용을 폭로했다.
윤석양 이병이 전두환이 사령관이었던 부대에 근무했던 데 비해, 이지문 중위는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12·12 쿠데타 때 사단장이었던 9사단에 근무하고 있었다. 이지문 중위는 '총선 전에 치러진 군대 부재자 투표 때 민자당 후보를 찍으라는 압력이 병사들에게 가해지고 심지어 공개투표까지 이루어졌다'는 내용을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이 기자회견은, 6월항쟁의 민의를 왜곡하는 3당 합당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이승만의 3·15 부정선거를 연상시키는 위헌적 불법선거 수단까지 동원해 국민의 뜻을 억압하려는 보수정당의 부조리를 만천하에 드러낸 사건이었다. 그런 일을 한 직후, 이지문 중위는 근무지를 이탈했다는 이유로 연행돼 구속됐다가 이병으로 파면됐다. 3년간의 법정 다툼 끝에 파면을 취소시키고 중위로 전역했다.
이지문 중위의 기자회견 이틀 뒤 열린 제14대 총선에서, 민자당은 과반수에서 1석 모자라는 149석을 얻는 데 그쳤다. 13대 총선에서 도합 219석을 얻은 세 정당이 하나로 뭉쳐 거대 여당을 만들었건만, 제1당이기는 하지만 과반수가 안 되는 의석으로 대폭 줄어든 것이다. 3당 합당의 '보람'이 상당부분 없어졌던 것이다.
한국 사회가 진보하는 데 기여했던 폭로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