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와 전두환은 권력에 눈멀어 민주주의를 유린한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1979년 12.12군사반란 후 찍은 기념사진
연합뉴스
전군 지휘관회의는 최성택 합참 정보국장의 정세보고와 현황설명 후 자유토론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정호용 특전사령관과 노태우 수경사령관, 박준병 20사단장 등이 강경발언을 계속했으며, 일부 신중론이 있었지만 대세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신군부는 회의가 끝날 무렵 백지를 돌려 참석자들의 연서명을 받았다.
회의를 마친 주영복 국방장관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전국 주요 지휘관들의 연서명이 첨부된 신군부의 시국대책안을 들고 오후 5시경 신 국무총리를 찾아갔다.
신 총리는 국보위설치안에 대해서만 반대하고 나머지는 모두 받아들였다. 셋은 곧바로 청와대로 가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군부의 시국대책안을 설명했다. 최규하는 오후 7시경 이를 승인하고 신 총리에게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이보다 앞선 16일 밤 10시 30분경, 최 대통령이 사우디 방문에서 앞당겨 귀국하자 전두환은 신 총리, 이희성 계엄사령관, 주 국방, 김종환 내무장관과 청와대에 들어가 비상계엄 확대조치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청와대를 나온 전두환은 보안사의 권력장악 시나리오 준비팀인 권정달 정보처장, 이학봉 대공처장, 허화평 비서실장, 허삼수 인사처장 등 심복들을 가동시켜 군지휘관회의에서 결정할 사항과 민주세력을 말살하기 위한 작전을 준비시켰다.
신군부는 5월 초순부터 이른바 '충정작전'의 구실로 충정부대의 서울 인근 투입을 5월 17일 이전에 이미 완료했다. 특히 광주에는 공수부대의 핵심부대를 파견했다.
신군부는 치밀하게 짜여진 작전계획에 따라 5월 18일 0시를 기해 지역계엄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하고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표, △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및 옥내외 집회ㆍ시위의 금지 △ 언론ㆍ출판ㆍ보도 및 방송의 사전검열 △ 각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
이어서 18일에는 김대중ㆍ김상현ㆍ김종필ㆍ이후락 등 26명의 정치인들을 학원ㆍ노사분규ㆍ선동과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로 합동수사본부에 연행하고 김영삼을 가택연금시키는 등 정치적 일대탄압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장일순은 이번에는 잡혀가지 않았으나 경계와 감시는 어느 때 못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