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탁반공건국학생공적비(보라매공원)공적비는 2004년에 세워졌다. 전면에는 이승만의 '남북통일', 뒷면에는 김구의 '진충보국'이라는 휘호가 새겨져 있다.
김학규
대한민국이 반탁반공의 승리로 건국됐다고?
그런데 이상하다. 대한민국 현행 헌법(10호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로 시작된다.
1948년 7월 17일에 선포된 제헌헌법 전문에도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로 시작된다.
대한민국 헌법은 1919년 3.1운동의 결과 대한민국이 이미 건립됐고, 1948년 8월 15일은 해방정국에서 대한민국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대한민국 정부를 정식으로 '수립'한 날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3·1운동의 결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사상과 이념을 떠나 일제로부터 자주독립에 동의하는 모든 세력과 인사들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반공'을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으로 내세울 수 없다는 점도 명백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도 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를 이끈 사회주의자였으며,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지명하는 등 국내에서 '한성임시정부' 구성을 주도하고 임시정부 수립을 알리는 국민대회를 이끈 인물의 하나도 저명한 사회주의자 김사국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대한민국이 1948년 8월 15일 반탁반공운동의 승리로 건국되었다'고 보는 보라매공원의 충혼탑과 공적비의 시각은 대한민국의 헌법 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로써 우리는 박근혜 정부 시절 추진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과정에서 제기된 '8월 15일을 건국절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건국절 논란을 불러일으킨 인사들과 보라매공원의 충혼탑과 공적비가 궤를 함께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2019년이 3.1운동 100주년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라는 점을 상기해볼 때 충혼탑과 공적비의 이러한 시각은 비판적 검토가 반드시 필요하다.
'반탁'은 과연 절대선이고 정의였을까?
충혼탑과 공적비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또 발견된다.
충혼탑 아랫단에는 백범 김구의 '反託勝利'(반탁승리) 휘호가 쓰여져 있고, 공적비 아랫단에는 우남 이승만의 '南北統一'(남북통일) 휘호와 김구의 '盡忠報國'(진충보국) 휘호가 앞뒤로 새겨져 있다. 이철승이 백범 김구의 '反託勝利'(반탁승리) 휘호를 1946년 1월 반탁학련 결성 직후 경교장에서 받았다고 증언(<한국현대사증언 TV자서전>, KBS)한 것으로 보아 다른 휘호도 이승만과 김구로부터 직접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해방정국에서 김구와 이승만의 노선이 달랐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두 사람의 휘호가 충혼탑과 공적비에 함께 새겨져 있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느낄 것이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한국 현대사는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아픈 역사를 만들어냈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여전히 우리의 지상 과제로 남아 있다. 이런 점에서 학계는 물론 현행 역사 교과서도 해방정국에서 벌어진 '반탁반공운동'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재평가의 핵심은 '반탁'을 절대화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점이다. 당시 반탁운동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 미·영·중·소 4대국에 의한 '신탁통치'가 실시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본격화됐다.
이를 계기로 좌우갈등이 본격화됐고, 결국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서 남과 북에 두 개의 나라를 세우는 결과로 귀결되고 말았다.